카산드라는 트로이 최후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로 미모가 뛰어났다. 예언의 신 아폴론은 사랑을 조건으로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었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약속을 어겼다. 화가 난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예언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만들어버렸다. 트로이전쟁 때 그리스 연합군의 꾀돌이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의 목마'를 남겨놓은 뒤 짐짓 철수한 척했다. 카산드라는 목마를 성 안에 들여놓으면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트로이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결국 트로이는 목마에서 뛰쳐나온 그리스 무사들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경제에서 거품을 경고하는 것은 카산드라의 예언과 비슷하다. 거품은 흔히 풍요감을 동반한다. 주식도 뛰고 부동산도 뛰고 실적도 뛴다. 투자자들은 "이번은 다르다"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때 거품을 경고하는 예언자는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못된 훼방꾼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광기, 패닉, 붕괴-금융위기의 역사'를 쓴 찰스 킨들버거 전 MIT 교수(1910~2003)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의 경고가 효과적이려면 경고성 성명을 충분히 일찍 내놓아야 하지만, 성명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려면 충분히 늦은 시점에 내놓아야 한다." 경고가 너무 이르면 듣는 이가 없고 너무 늦으면 하나마나다. 거품 예언의 모순적 숙명이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위기를 예측한 인물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것도 위기가 터진 다음의 일이다.
20여년 전 일본에서 거품이 꺼질 땐 예언조차 없었다. 당시 도쿄 시내 왕궁 부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 땅값보다 더 비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킨들버거에 따르면 "1980년대 말 전 세계 건설용 타워크레인의 절반이 도쿄에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일본 증시의 시가총액은 미국 증시의 두배에 달했다.
1990년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은행이 부동산 대출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했다. 거품은 순식간에 꺼졌다. 부동산·주식값이 곤두박질쳤고 기업·은행은 동반부실의 길을 걸었다. '잃어버린 20년'의 터널이 열린 것이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일본 거품 붕괴의 부작용이다. 경제대국 일본이 폭삭 가라앉자 도쿄로부터 밀려나온 자금이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 시장을 훑고 다녔다. 돈이 넘치자 한동안은 좋았다. 그러나 1996년 태국 금융권에서 대규모 대출 손실이 발행하자 외국자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때도 사전 경고가 없었다.
아시아를 빠져나온 돈은 미국으로 흘러들어갔다. 1990년대 중반 미국 주가는 미친 듯이 뛰었다. 1996년 12월 앨런 그린스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예언자를 자처했다. 그는 주가에 '비이성적 과열'이 끼여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시장에서 현대판 카산드라 취급을 당했다. 그린스펀 자신도 예언자 노릇에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저금리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미국 증시는 2000년대 초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2008년 금융위기로 파국을 맞았다.
킨들버거는 "자산가격 거품은 신용의 증가에 달려 있다"는 공리(公理)를 제시한다. 돈이 넘치면 거품이 생긴다는 뜻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유럽·일본은 돈을 왕창 풀었다. 언젠가는 선진국에서 풀린 수조달러 규모의 거대한 돈덩이가 곳곳에서 사달을 일으킬 공산이 크다. 그 많은 돈을 어찌할 것인가. 그냥 둬도 문제, 거둬들여도 문제다. 이 불황에 생뚱맞게 무슨 거품 걱정이냐고? 그린스펀의 예언은 12년 뒤 금융위기로 폭발했다.
카산드라 취급을 당하더라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아베노믹스의 후폭풍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우리에게 악몽은 외환·금융위기 두 번으로 충분하다. 악마는 맨 뒤에 처진 사람을 잡아먹는 법이다(Devil take the hindm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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