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입자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인체에 무해하면서 발광 기능을 가진 나노 입자를 활용해 환자의 몸속에 주입하면 질병 부위에만 흡착돼 수술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뜻 보기에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기초과학 연구성과가 사실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현택환 기초과학연구원 나노 입자 연구단장)
기초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성과 배출을 목표로 세워진 기초과학연구원(IBS). IBS는 지난해 5월부터 이러한 연구성과를 낼 국내외 유수 학자들을 찾아 연구단장으로 선정해 1인당 10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해 왔다. 연구단장으로 선정된다는 것은 국내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자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IBS 나노 입자 연구단장으로 선정돼 활동 중인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중견석좌교수는 균일한 나노 입자를 제조하는 데 있어 전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과학자다. 30일 그를 만나 기초과학 분야 육성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현재 수행 중인 연구 분야에 대해 소개한다면.
▲최근 십 몇년 동안 제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나노 소재 입자를 만들고 이를 균일한 크기로 가공해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12년 전인 2001년 미국 화학회지에 크기 분리과정 없이 열분해 방법을 이용해 균일한 산화철 나노 입자를 제조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2004년에 저가의 금속염을 시작 물질로 사용해 균일한 나노 입자를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나노 입자를 상용화 수준까지 제조할 수 있게 됐고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인정받았다. 이 연구의 활용도는 매우 높다. 특히 의료 분야와 에너지 분야에 많이 사용된다. 병원에서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하면서 환부를 정확히 찾아내는 데 필요한 형광 나노물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또 3개월 전 나노 입자의 갈바닉 부식 작용기전을 규명해 속이 텅 빈 복합 나노 입자를 만들고 리튬이온 배터리와 태양전지 등의 용량을 높일 수 있게 됐다.
지금껏 의료와 에너지 분야에서 제 연구성과가 응용되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좀 더 의료쪽에 나노물질이 활용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지금은 소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왔다면 이제는 대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나노 입자 조영제 등이 사람에게 활용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왜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나.
▲단순한 답이지만 재밌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지겨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연구라는 것이 때로는 힘들지만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새롭게 개척한 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한 가지 더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도전정신으로 연구를 즐기고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기쁨이다. 당장의 연구 결과가 인류에 어떤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쓰임이 있고 적어도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물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인류의 지식의 외연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되기로 한 건 40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대구 달성군의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다 학교 대표로 과학경시대회를 나갔는데 군 단위 대회에서 은상을 받고 바로 꿈이 결정됐다. 이후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화학 분야를 선택하게 됐다. 목표를 정하고 지금까지 뒤돌아보지 않고 이 일에만 매달렸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연구는 항상 쉽지 않다. 처음 박사과정 때 연구 성과가 몇 년간 안 나오고 논문 진도도 나가지 않았을 때도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은 분야의 선두, 프론트라인에 서서 연구한다는 게 더욱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앞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매일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찧는 느낌이랄까. 지금하고 있는 연구의 결과가 안 나온다면 엄청난 시련이 되는 것이다. 조교수 때는 앞서 나가는 선배 교수들을 목표로 따라잡으려 정신없이 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앞에 아무것도 없음을 느꼈고 엄청난 책임감을 안게 됐다. 지금 내는 모든 논문은 연구실 밖으로 내보낼 때 예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검증한다. 연구실에서 결과가 나와도 웬만한 성과가 아니면 사장시킨다. 주어진 타이틀에 맞도록 다른 연구자들이 조금이라도 허튼 논문이라 비판하지 않도록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때는 언제인가.
▲사람들이 연구성과에 대해 깜짝 놀라는 것을 볼 때다. 지난 2004년 네이처 머티리얼지에 논문을 냈을 때가 그랬다. 논문을 게재하고 1주일도 안돼 미국의 CNN에서 연락이 와 인터뷰를 했고 기사가 뜨니 이름이 확 뜨고 유명세를 탔다. 이후 노벨화학상 논문이 가장 많이 나와 세계 화학 분야에서 최고의 저널로 일컬어진 미국 화학회지에 3편의 논문을 냈고 서울대 교수가 됐다. 4년 뒤인 2008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는 지금까지 논문인용 횟수가 1000번 이상을 기록했다. 이를 발판으로 계속 올라오니 지난 2010년 미국 화학회지에서 연락이 와 부편집장으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한국인 교수로서 처음 그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 매우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 자리에 오니 이제는 내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 해외로 분주히 강연을 하러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먼저 찾아온다. 이렇게 거쳐온 순간순간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발전과 노벨상 수상을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과학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는 사람은 오히려 위험하다. 지난 2006년 황우석 교수 사태를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오랜 시간 차근차근 거쳐오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풀뿌리연구가 저변에 깔려 있어야 그 가운데 우수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거다. 피라미드식 규모의 연구자 육성시스템이 조성돼야 한다. 시작하는 신진 연구자나 중견 연구자, 리더 연구자가 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관리를 해 과학연구의 보편성과 수월성이 다 충족되는 인프라가 구축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정책당국의 예산 배분이 중요하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농한기 농부가 내년 농사를 위해 저장해 놓는 씨앗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당장 배고프다고 다 먹어버리면 내년에는 파종할 씨앗이 없어 굶어죽게 되는 것이다. 요새 젊은 교수들이 대학에 임용되자마자 심각한 성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들었다. 한동안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에 대한 약속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30대 중반의 과학자들에게는 정부와 대학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 개개인도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자신감으로 연구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받는 과학자가 사회적 책임을 갖고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기 위해 정진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시작부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별취재팀 윤정남 팀장 김경수 정명진 임광복 이병철 박지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