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는 전통의 강대국 중국의 몰락이다. 중세 때 중국은 기술 혁신을 선도했다.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은 중국이 원천기술 보유국이다. 항해술도 뛰어났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지리상의 대발견'은 유럽인이 아니라 중국인 정화(鄭和)가 선구자다.
정화는 명(明)나라 영락제의 명에 따라 1405년 수백척의 보물선단(寶船)을 띄웠다. 그는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환관 출신 제독이었다. 그는 7차례에 걸친 대항해를 통해 동남아시아, 인도, 스리랑카는 물론 중동과 아프리카 동부까지 섭렵했다. 역사는 페르시아의 호르무즈, 아라비아의 아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케냐의 몸바사까지 명나라 깃발을 단 배들이 오갔다고 전한다. 가장 큰 배는 길이가 120m에 달했고 총 인원만도 3만명에 육박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1492년)한 것은 그로부터 약 90년 뒤의 일이다. 바스쿠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찾은 것(1497년)은 그보다 더 늦다. 콜럼버스는 세 척의 보잘것없는 배로 대서양을 건넜고 바스쿠 다가마 역시 세 척의 배로 희망봉을 돌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콜럼버스나 바스쿠 다가마가 항해 중 정화를 만나 해전을 벌였다면 승패는 뻔했다. 우선 명나라 보물선은 덩치에서 유럽 배들을 압도했다. 바스쿠 다가마가 이끌던 배는 일렬로 다섯 척을 늘어놓아야 보물선 한 척에 겨우 댈 만했다. 또 서양 배들은 재래식 활로 무장한 반면 중국 배는 총통 등 첨단 화약무기를 장착했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런 막강한 화력과 뛰어난 항해술, 선박건조술을 갖춘 중국이 왜 유럽 열강의 먹잇감이 됐을까. 왜 거꾸로 중국이 희망봉을 돌아 유럽을 정복하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지 못했을까. 미국 UCLA 대학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역작 '총, 균, 쇠'에서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정말 왜 그랬을까. 다이아몬드 교수는 정치에서 원인을 찾는다. 책을 인용해 보자. "1405~1433년 일곱 차례의 선단이 중국을 떠나 항해했는데… 전형적인 정치적 착오에 부딪혀 중단되고 말았다. 중국 조정의 두 파벌(환관과 반대파)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반대파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자 곧 선단 파견을 중단시켰고, 조선소마저 해체하고 해양 항해를 금지했다."
중국이 스스로 묘혈을 판 사례는 더 있다. 14세기엔 정교한 수력방적기 개발을 포기해 산업혁명의 문턱에서 물러났고, 세계 기술을 선도하던 기계식 시계도 포기했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1960~1970년대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대혁명의 광기도 같은 맥락에서 본다. 정치 지도자들이 내린 잘못된 결정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간 문을 닫고 경제가 후퇴한 걸 두고 하는 얘기다.
정화 에피소드를 곱씹을수록 개혁·개방의 선구자 덩샤오핑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그는 검든 희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을 앞세워 중국 부흥의 토대를 놓았다. 방향만 잘 잡으면 인구 13억의 대륙은 무서운 힘과 속도로 질주한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과연 방향은 잘 잡은 걸까. 세계에 한국을 알린 기업들은 국회에서 뭇매를 맞았다. 대기업 때리기는 유행처럼 번졌다. 투자 촉진 법안엔 먼지가 수북이 쌓였다. 어쩐지 불안하다. 이러다 정치 때문에 뒷걸음질친 나라가 될까봐서다.
한국 정치는 원래 이랬다고? 그래도 경제는 잘 굴러왔다고? 이번에도 잘될 거라고? 글쎄, 그럴까. 노구를 이끌고 1433년 최후의 항해를 떠난 정화는 호르무즈해협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수백년간 그는 잊혀진 존재였다. 정화는 세계를 누빈 개척자였다. 파이어니어를 깔아뭉개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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