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선착장.기자는 서울시가 제공하는 장화와 구명조끼를 착용, 관리선을 타고 밤섬으로 향했다. 밤섬에 도착할 즈음 수백여마리의 가마우지 무리가 밤섬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선착장을 출발한 지 10여분 지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측의 안내를 받아 마포쪽으로 밤섬에 오르니 어른 키보다 큰 갈대숲이 일행을 맞았다.
지난 1968년 한강 개발 과정에서 폭파, 해체되면서 62가구 443명의 주민들이 떠난 밤섬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 40여년이 흐르면서 퇴적과 습지로 바뀌어 버드나무와 갈대, 각종 조류 등이 서식하는 등 세계적인 도심 속 천연 원시림으로 바뀌어 지난해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버드나무 숲으로 덮인 밤섬 내부. 사진=김범석 기자
■흔치 않은 도심 속 원시림
자살 실패로 밤섬에 표류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씨 표류기'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밤섬은 40년 넘게 사람의 발길이 차단된 탓에 도심 속 무인도 그 자체 모습이었다. 갈대 숲을 지나 발길을 옮기던 중 생각지도 못한 꿩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평소 없던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모습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50m쯤 더 들어가니 1968년 한강 개발 전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던 마을 터가 나왔다. 비교적 평탄한 지역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야생화와 갈대가 뒤덮여 마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밤섬 주민 옛 생활터'라고 쓰인 표지석을 보고서야 마을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섬의 반대 쪽(여의도쪽)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니 바다 해안선 같은 모래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고운 모래도 있었지만 팔당호 방류량과 인천앞바다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퇴적된 펄로 발이 푹푹 빠질 정도였다.
여기서 조금 동쪽으로 올라가니 샛강이 나왔다. 밤섬은 이 샛강을 기준으로 동측의 윗밤섬과 서측의 아랫밤섬으로 나뉜다. 이날은 수심이 얕아져 자연스럽게 두 섬을 오갈 수 있지만 수심이 올라갈 때는 샛강이 물이 차게 돼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속살을 드러낸 샛강을 따라 윗섬 깊속이 들어가니 어느 이름 모를 원시림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40여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탓에 이곳에는 버드나무와 갈대, 희귀 조류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거대도시의 도심에 위치한 철새도래지인 밤섬은 멸종위기종인 흰꼬리수리, 천연기념물 원앙, 황조롱이, 참매, 말똥가리 등 보호가치가 높은 철새들의 보금자리다.
40여년 동안 퇴적으로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거듭났다. 지금도 퇴적으로 연평균 4200㎡씩 면적이 늘고 있다고 서울시 관계자는 설명했다.
안내를 맡은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이종혁 환경과장은 "한강 개발을 위해 밤섬이 폭파해체된 뒤 10여개의 조그마한 섬 형태로 남아 자연초지로 존치돼오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토사 등이 퇴적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면서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대도시 속의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만큼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할 큰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한강 개발로 폭파되기 전의 밤섬 모습. 한강을 오가는 배들과 밭이 보인다.
■밤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서강대교 중간 한강상의 영등포구와 마포구에 걸쳐 있는 밤섬은 마포 와우산에서 바라본 최초의 모습이 밤알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이용됐고 조선시대 한양(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
이후 뽕나무 등을 재배하며 1967년까지 62가구 443명이 거주하면서 고기잡이와 조선, 뽕나무.약초(감초) 재배나 염소 방목 등을 통해 생활했다. 특히 당시 섬의 동쪽 절벽은 '작은 해금강'으로 불릴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밤섬의 여의도 쪽 현재 모습. 우거진 갈대 숲과 진흙 뻘이 마치 바다의 무인도 같다.
이후 1968년 여의도 개발 당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 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토석을 조달하기 위해 이 섬이 폭파, 해체됐다. 이에 따라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인근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으로 이주했다.
밤섬 폭파에 따라 중심부가 집중적으로 파헤쳐져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윗밤섬과 마포구 당인동의 아랫밤섬으로 나뉘어지고 밤섬 대부분이 사라졌다.
서울시는 지난 1999년 밤섬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 결과 조류는 2007년 28종에서 2010년 33종으로, 어류는 2007년 37종에서 2010년 39종으로 늘어나는 등 밤섬의 생태환경도 날로 개선되고 있다.
10년 단위로 촬영한 밤섬 모습. 위부터 1982년, 1992년, 2009년.
대규모 버드나무 군락으로 조류가 많이 서식하는 아랫밤섬의 경우 민물가마우지, 왜가리, 중대백로, 검은댕기해오라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꿩, 깝작도요, 괭이갈매기, 멧비둘기, 파랑새, 제비, 직박구리, 울새, 휘파람새, 쇠개개비, 개개비, 노랑눈썹솔새, 제비딱새, 쇠솔딱새, 노랑딱새, 박새, 검은머리촉새, 촉새, 참새, 쇠찌르레기, 까치 등 철새와 텃새가 모두 관찰되고 있다.
윗밤섬에는 민물가마우지, 왜가리, 해오라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꿩, 멧비둘기, 뻐꾸기, 제비, 쇠개개비, 개개비, 찌르레기, 까치 등이 서식한다.
마포구와 마포문화원 주최로 매년 실향민을 위한 고향 방문 행사도 열린다. 올해는 지난달 23일 고향방문행사가 개최됐고 이 행사에 10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람사르 습지로 지정
밤섬은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으로 도심속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난해 람사르 사무국은 밤섬이 람사르 습지로 공식 지정됐다는 공문을 환경부에 통보해왔다. 람사르 사무국은 멸종위기종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로 보전 가치가 있거나 희귀하고 독특한 유형의 습지를 대상으로 람사르 습지로 지정한다.
현재 전 세계 160개국의 1970곳이 지정돼 있고 우리나라에는 강원 인제군 대암산용늪, 경남 창녕군 우포늪 등 17곳이 지정돼 있다. 밤섬은 5월이면 오색딱다구리, 파랑새 등과 여름철새인 개개비, 해오라기 등 많은 새들의 짝짓기·산란 장소로 장관을 이룬다.
서울시는 밤섬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습지로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시는시민단체, 대학, 인근 주민이 참여해 도시발전과 환경보전이 공존하는 습지로 발전시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서울시 이창학 대변인은 "밤섬 인근에는 국회, 금융가, 언론계가 자리한 여의도가 있어 밤섬의 중요성과 생태 보전을 위해 어떻게 지원할지 유리한 전략적 위치에 있는 만큼 정책 결정권자들의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ssuccu@fnnews.com 김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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