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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달력은 본디 대차대조표였다

[fn스트리트] 달력은 본디 대차대조표였다

달포 뒤면 한 해가 저무는 세밑. 달력 낱장들이 뜯겨져 나간 탓일까. 너널너덜해진 달력에서 희로애락이 물씬 묻어난다.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세월의 편린들. 세상사가 각본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기에 달력은 그리움이 되고 향수가 된다. 한 해를 되짚게 되는 까닭이다. 회한으로 얼룩지지 않은 세월이 어디 있으랴. 뭉뚱그려 허허롭다. 상실감이랄까. 달랑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처연하다.

종이가 귀한 시절, 달력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달, 날, 요일, 이십사절기, 행사일이 꼼꼼하게 박혔으니 서민들에겐 이만한 수첩도 없었다. 그 위에 생일과 기일, 결혼식 등 가족의 기념일을 얹히면 스마트폰 부럽지 않았다. 공과금 수납일, 빌려준 돈 받는 날, 이자 내는 날도 기록했다. 추억의 여행지는 물론 더러는 연인 이름을 전신부호처럼 표시했다. 달력은 가계부였으며 일기장이었다. 교과서가 닳을세라 겉장을 싸는 데도 그만이었다. 부드럽게 바스락거리는 동네 한의원·금은방 일력(日曆)은 화장지 대용품이었다.

그때 그 시절, 달력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연말연시 달력 구하기 전쟁은 흔한 풍경이었다. '달력 확보 능력=권력'으로 통했기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동분서주했다. 달력은 한국경제 변천사를 투영하고 있다. 1950∼60년대는 산아제한, 절약 등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계몽운동 문구가 적힌 달력이 주종을 이뤘다. 경제부흥기에 들어선 1970∼80년대는 은막의 스타들이 달력 모델이었다. 달력은 연예인의 등용문이었다. 인테리어 개념으로 바뀐 건 1990년대 이후부터. 유명 화가의 그림을 담은 달력이 인기다.

달력 찍어내는 소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식이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달력 인심이 박해졌다는 것이다. 한 해 주문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금융권이 대폭 줄였다니 실감 난다. 850만부로 지난해(945만부)에 비해 10%나 줄었다. 경영실적 악화가 이유이긴 해도 스케줄 관리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 사용 확대가 결정타다.

시대는 변했지만 또르르 말린 달력을 펼쳐 들면 가슴 설레는 건 변함이 없다. 인류 지혜의 산물 중 하나라는 달력. 영어로는 캘린더(calendar)다.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의미는 대차대조표다. 말하자면 기업의 결산처럼 재정 상태를 도식화한 표, 우리네 삶에 다름 아니다. 삶을 자산에 빗대자면 빚진 부채와 베푼 자본이 있는 것이다. 달력은 어쩌면 지나온 삶을 청산하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음이랴. 지금 당신은 어떤 좌표에 있는가.

joosik@fnnews.com 김주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