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로 전자 결제가 가능한 구세군의 '디지털 자선냄비'
#이경자(28·여)씨는 어렸을 때 동네 시장에서 부모님이 쥐어준 꼬깃꼬깃한 천 원 한 장을 구세군 냄비에 넣었던 경험이 있다. "고맙습니다"라고 웃으며 말해주는 자원봉사자의 미소에 부끄러워져 엄마의 품으로 달리듯 도망쳐 왔던 기억이 있다. 얼마 전 이씨는 평택역 인근의 구세군 냄비에 신용카드 결제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축의금과 부조금을 신용카드로 결제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기부까지 카드로 한다니 씁쓸하기도 하고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10일 오후 2시, 용산역과 함께 전국에서 자선냄비의 기부 온기가 가장 높다는 서울 명동의 한 구세군 냄비 앞. 기자가 약 20분을 기다린 끝에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사용해 기부금을 내는 시민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경기도 의왕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명동을 방문했다는 손경자(71) 할머니는 "기부를 하고 싶은데 현금이 없어 카드로 결제했다"고 말했다. 조심스럽게 기부 금액을 묻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할머니의 성함도 거듭 물은 후에야 할아버지께 받아낼 수 있었다. 기부를 하는 사람은 부끄럼을 잘 탄다.
신용카드를 이용해 기부를 하고 있는 손경자(71) 할머니와 이빛나(27) 구세군 사관학생. 이씨는 낮 12시부터 오후 8시까지 2인 1조를 이뤄 한 시간씩 교대 근무를 한다. 명동역 인근에는 총 4팀의 구세군 자선냄비가 있다. 이씨는 "가끔 동전이나 1000원 등 소액을 기부해도 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다며 금액에 상관없이 한분 한분의 따뜻한 손길이 모여 좋은 일에 쓰인다"고 말했다.
구세군자선냄비 본부는 지난해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한 '디지털 자선냄비'를 최초로 선보였다. 신용카드사회공헌위원회의 협조를 받아 지난해 총 300대의 카드단말기를 지원받고 올해 추가로 150대를 지원받았다. 전국적으로 총 350곳에서 자선냄비가 운영되는 것을 감안하면 고장 수리 중인 곳을 빼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이 디지털 자선냄비를 만나 볼 수 있는 셈이다. 자선냄비본부에 따르면 2007~2008년 사이에는 교통카드를 사용한 결제 방식을 도입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해 디지털 자선냄비를 신용카드만 사용하게 바꿨다. 모금은 지난 2일부터 시작돼 해가 바뀌기 전인 12월 31일 밤 12시까지 이뤄진다. 디지털 자선냄비를 포함한 올해 총 모금 목표액은 55억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시민들은 디지털 자선냄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손 할머니에 앞서 기부를 한 5명의 시민 역시 모두 현금을 넣었다.
명동에 있는 4곳의 자선냄비 중 한 곳을 담당하는 구세군 사관학교 1학년 이빛나(27)씨는 "아직 시민들이 신용카드를 사용해 기부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디지털 자선냄비로 모인 기부금은 총 51여억원 중 4000만원에 불과해 1%도 되지 않았다.
이씨에게 기자임을 밝히기 전 체크카드를 활용해 직접 기부를 시도해봤다. 카드 결제 가능여부를 묻자 이씨는 원하는 만큼 기부가 가능하다며 금액을 물어왔다.
작년에는 1회에 2000원씩 여러 차례 기부할 수 있었으나 올해부터는 기본 금액을 총 4종류로 정했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명동, 광화문, 여의도 등 대부분의 지역이 2000원, 5000원, 1만원, 2만원이 기본 설정이었다.
하지만 원하는 금액에 따라 조정도 가능하다. 또 기부 취지를 고려해 디지털 자선냄비를 통해 기부 하면 신용카드 수수료가 붙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신용카드를 이용한 기부에 대해 아직은 낯설다는 반응이다. 서울 이문동에 거주하는 김동혁(26)씨는 "결제 수단이 다양해진 만큼 모금의 편의성은 커졌지만 아직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순수한 의도에서 행해지는 기부라는 선행에 미래의 빚을 담보로 발행되는 신용카드라는 물질적 요소가 반영 되면서 애초의 의도가 훼손되는 느낌이 든다는 것.
이에 대해 자선냄비 본부의 허원기 팀장은 기부 방식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 신용카드를 통한 기부로 좀 더 투명한 기부 문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강철희 교수는 "사람들이 신용카드로 기부를 하는 것에 아직까지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며 "하지만 미래의 빚을 담보로 하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충동구매'를 하는 것보다는 '충동기부'를 하는 행동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어 "연말이면 어려운 형편에도 행상을 통해 어렵게 번 돈 몇 억원을 기부하는 할머니의 미담 소식 등이 자주 들린다"며 "이런 뉴스도 좋지만 한국에도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처럼 '모범이 되는 기부자 혹은 리더(examplary donor or leader)'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더불어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민들도 많기 때문에 디지털 자선냄비에 대한 홍보 강화도 필수"라고 덧붙였다.
명동역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종소리와 함께 "사랑과 정성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큰 힘을 전하는 구세군 자선냄비 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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