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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한국’을 준비하라] (2) 양창석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 “남북간 대화 지속돼야”

[‘통일 한국’을 준비하라] (2) 양창석 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 “남북간 대화 지속돼야”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가 지난달 27일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지도자의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는 점,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남한을 동경하고 통일을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박범준 기자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권자의 의지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책이 필요하고, 결국 북한 주민이 남한에 동경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는 지난 2013년 남북회담본부장을 끝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통일부에서 31년간 근무한 북한전문가다.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부터 1995년까지는 주독일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면서 독일 통일 주역들을 일일이 면담해 그 노하우를 습득했다. 그때 취재한 이야기를 엮어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양 감사는 지금도 거의 매주 개성을 드나들면서 북한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양 감사는 지난달 24일 파이낸셜뉴스와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으로 집권자의 의지와 북한 주민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달 27일 그를 만나 독일 통일에서 배울 점과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해 들어봤다.

―통일부가 있는데 통일준비위원회란 별도 조직이 필요한지를 놓고 말이 많다. 통일부 핵심 관료 출신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통일 준비업무를 통일부가 주도할 경우 다른 정부부처에 협조를 구하기가 어렵다. 대통령 산하 위원회가 나서서 지휘해야 각 부처가 책임감 있게 일을 진행할 것이다. 과거 1990년 통일원 장관을 통일부총리로 격상시키고 1991년에는 통일관계장관회의가 만들어졌다. 통일부총리는 각 정부부처에 통일업무를 전담하는 부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경제부총리와 통일부총리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경제장관회의에 소속된 부처들은 통일 관련 업무를 한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통일준비위원회가 총괄하고 그 밑에서 통일부가 실제 정책을 집행하면 된다. 다른 부처들도 위원회의 지휘를 받아 자신들에게 맞는 업무를 책임지면 된다. 서독은 총리 아래에 연방총리실을 두고 동독과의 주요 협상에서는 총리실 장관이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물론 내독관계성(우리나라 통일부 격) 직원이 모든 협상에 참여했다. 통일부와 통일준비위원회는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따로 있을 것이다.

―독일은 통일의 모델로 많이 언급되지만 우리와 다른 상황도 많았다. 서독은 어떻게 동독과 교류하고 통일을 이끌었나.

▲일단 북한 정권은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정권이고,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 중 잘사는 나라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달러를 넘었다. 지금 북한의 소득은 1000달러가량으로 둘이 비교도 안 된다. 북한 주민은 의식주 해결이 안 되니 우리가 지원하는 것들도 주로 쌀, 영양제, 식료품과 의약품 등이다. 서독은 주로 교회를 통해 동독이 필요로 하는 산업용 원자재를 지원했고, 동독은 이것을 팔아 외화를 조달할 수 있었다. 서독 교회는 또 정부를 대신해 현물을 제공하고, 정치범을 동독 정부로부터 넘겨받는 일도 했다. 동독 교회는 서독과의 인도적 사업을 담당하면서 입지가 강화됐다. 후에 반체제 인사를 수용하면서 저항세력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1989년 동독 시민혁명 당시 150여개 저항단체가 교회의 보호 아래 규합하면서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은 이미 통일 이전부터 활발한 인적 교류가 있었다던데 어느 정도 규모였나.

▲1982~1983년에 19억5000만마르크(당시 약 4억달러)를 서독 은행이 동독에 빌려줬다. 보증은 서독 연방정부가 했다. 당시 서독의 콜 총리가 이끄는 보수정권은 냉전체제하에서 동독이 무너질 경우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서독은 이런 융자를 조건으로 양국 주민이 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여행조건 자유화를 요구했다. 또 국경 부근에 설치된 도망자 자동발사시스템도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동독 주민의 서독 방문이 150만명 선에서 1986년 200만명, 1987년 500만명, 1988년 675만명으로 급증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하는 합법적 이주자도 2만여명에서 1984년 이후 3만5000명(정치범 포함 4만5000명)을 넘어섰다.

―주민 간 왕래까지 풀어줬으면 동·서독 간에 동질성이 많이 회복됐을 것 같다.

▲독일은 1972년 기본조약 체결 후 분야별로 조약을 맺어 나갔다.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1989년까지 22개 분야에 동·서독 정부 간 공동위원회가 열릴 정도로 교류협력이 확대됐다. 우리는 북한 주민과 접촉할 일이 거의 없지 않나. 또 기본적으로 동독 주민은 서독 TV와 라디오를 볼 수 있었다. 동독 정부가 방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국 간에 그만큼 신뢰도 쌓였다고 볼 수 있다.

서독의 브란트 총리는 소련이 있는 한 그동안 해왔던 것 같은 압박정책으로는 동독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하에 (그 이전 아데나워는 압박정책) 접촉을 통해 동독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전의 경제교류는 계속해왔다. 동독은 서독과의 교류협력을 제한하다가 1980년대 초반 외환위기를 겪고 1987년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거치면서 서독의 인적교류 확대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동독의 시민봉기는 왜 일어났나.

▲1970년대 후반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이 동독 등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한다. 이에 서방도 서독 등 나토 지역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하자 1980년대 초반 유럽에서 반핵운동이 벌어진다. 이때 동독 내부에서도 반핵 평화운동이 벌어졌고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가 무언의 시위, 평화의 시위 등을 주도했다. 결정적 계기는 1989년 5월 7일 부정 지방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당시 동독은 사상 처음 종교인의 투표소 참관을 허용했는데 투표율이 한참 못 미치는데도 찬성률이 97~98%씩 나오는 것을 보고 부정선거 여론이 확산됐다. 이때부터 동독 내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한 것이다.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시위진압 반대 입장에 이어 10월 9일 라이프치히 시위에는 7만명이 참석했다. 그 뒤 베를린에서는 100만명이 몰리게 되고, 11월 19일 마침내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인가.

▲인도적 지원과 대화 이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통일 기회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그때 집권자의 의지다. 주변국을 설득하는 능력 등 위기를 돌파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서독과 동독은 고위급 대화를 지속해왔고, 이를 통해 1989년 위기관리를 협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 외세가 개입하지 못한다. 만일 북한에서 급변 사태가 벌어지는데 남북 간에 대화가 없고 정보교류가 없다면 그사이 중국이 개입할 수도 있고 국제사회가 움직일 수 있다. 또 민족자결권 원칙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독은 민족자결권에 근거해 민주적 절차를 밟아 통일에 나섰다. 독일은 패전국이어서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아야 통일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없으니 그 부분은 독일보다 유리하지 않나.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북한 주민의 결정이 중요하다는 거다.

북한 정권이 민주정부로 넘어갈 때 통일에 대해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북한 주민의 의사가 중요하다. 북한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책으로 생활개선에 도움을 줘야 한다. 결국 북한 주민이 남한에 대한 동경심을 가져야 한다.

■약력 △56세 △경북대 경영학과 △영국 런던정경대(LSE) 석사 △단국대 정치학 박사 △주미대사관 통일관 △통일부 정세분석국장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

ahnman@fnnews.com 안승현 박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