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모씨는 한때 잘나가는 은행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50대 문턱을 바라보던 나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행을 떠나야만 했다. 연이은 실적악화로 그가 몸담고 있던 지점이 통폐합 대상지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한 저축은행 계약직 대출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이씨는 "누구도 내게 퇴직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넋 놓고 있다간 회사에서 제안한 퇴직금조차도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상당했다"며 "그래서 희망 아닌 희망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 전반에 불고 있는 명예퇴직바람에도 신세대와 구세대 간 세대차가 존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저금리·저수익 기조가 만연하자 기존 영업점을 통폐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금융권은 세대 간 명퇴전략 수립에 골몰하고 있다.
만기 퇴직이 가까운 40·50대 이상의 퇴직 예정자들은 '등 떠밀리듯' 직장을 나오는 반면 30·40대 초반의 퇴직 희망자들은 고액의 위로금을 챙기는 동시에 다른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퇴를 고려하고 있다.
■30대, 고액 위로금에 이직까지
9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지난해 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증권사 퇴직 행렬이 은행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미 우리투자증권, 삼성증권, 농협증권, 동양증권, 한화증권, SK증권 등 총 10곳 이상이 희망퇴직을 시행했다. 이어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농협, SC, 씨티은행까지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특히 명퇴 행렬에는 예전과 달리 30∼40대 젊은층이 적극 참여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당초 희망퇴직을 발표한 증권사·은행 등이 회망퇴직 신청 대상자를 젊은층까지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은 타 업종 대비 양호한 조건의 퇴직위로금을 산정하고 있는 터라 젊은층을 중심으로 하는 줄퇴직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현재 희망퇴직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씨티은행은 근속기간에 따라 월평균 임금의 최대 36개월치 월급을 특별퇴직금으로 제공하고, 자녀학자금 명목으로 대학생 이하 자녀 1명당 1000만원씩 최대 2000만원을 지급하는 등의 조건을 통해 현재까지 총 400~430여명의 희망퇴직자로부터 신청을 받은 상태다. 아직 명예퇴직 신청기간이 1주일가량 더 남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씨티은행 한 곳에서만 당초 사측에서 목표했던 650명을 상회하는 퇴직자가 나올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은행업계 한 관계자는 "외국계 은행은 물론 일반 시중은행 등은 증권업계와 비교해 봐도 훨씬 좋은 조건으로 희망퇴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 5~10년차 전후, 사내 '허리'에 해당하는 핵심 인력이 많이 빠져나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증권업계는 금융권에서도 근속연수가 짧은 업종인 것을 볼 때 희망퇴직 신청연령이 은행에 비해 더욱 낮아지는 분위기다. 과거엔 주로 경력 10~15년 이상 차장이나 부장급 직원이 희망퇴직을 신청한 반면 최근엔 경력 5~10년의 30대 대리나 과장급이 크게 늘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50대 "남고 싶은데" 눈물의 퇴직
반면 퇴직을 3~5년 남겨둔 40·50대 이상 퇴직 예정자들은 오히려 등 떠밀리듯 회사를 떠나고 있다. 증권은 물론 은행의 상당수가 제일 먼저 퇴직 대상자로 정한 기준이 임금피크제에 적용되는 임직원이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중장년층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이 되는 직원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5년가량 더 근무할 수 있지만, 현재 제시된 희망퇴직 조건이 더 낫다고 판단한 예비 퇴직자 사이에선 일찌감치 퇴직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올 들어 가장 먼저 인력감축에 나선 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는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신한.우리은행 등 다른 은행들 역시 부지점장급 이상 직원과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을 중심으로 명예퇴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 같은 업계 분위기가 자칫 지난 1998년 전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외환위기) 당시 줄도산으로 이어졌던 퇴직자들의 전철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수억원에 달하는 위로금을 주면서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이 중 상당수는 위로금을 종잣돈으로 식당 등 자영업을 시작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빈곤층으로 전락,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불경기가 계속되고, 특히 자영업 경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명퇴 위로금을 종잣돈으로 창업을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면서 "외환위기 때 창업에 실패한 실직자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듯이 최근 러시를 이루고 있는 명퇴자도 그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병덕 한국금융연구원 자본시장연구실 선임연구원은 "증권에 이어 은행권에서도 퇴직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위로금을 많이 줄 때 떠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또 30대의 젊고 유능한 인력들이 자발적으로 은행을 떠나는 것은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gms@fnnews.com 고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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