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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사람은] (3) 2002년 ‘붉은악마’ 단장, 12년이 흐른 지금은..

[그 시절, 그 사람은] (3) 2002년 ‘붉은악마’ 단장, 12년이 흐른 지금은..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응원단장으로 활약했던 유영운 더블유원코리아 대표가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2000년 이후 대한민국은 큰 변화를 겪어 왔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미국발 금융위기,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9·11테러, 가계 부실, 집값 하락, 내수경기 침체, 세월호 참사 등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사다난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도 명멸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창간 14주년을 맞이하여 창간 이후 21세기 대한민국을 움직였던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14회에 걸쳐 조명해본다.

"경찰을 제외하고 민간인 중에서는 응원 준비를 위해 가장 먼저 경기장에 입장했어요. 2002년 월드컵 첫 경기가 폴란드를 상대로 부산에서 열렸는데, 하나둘 붉은색 티를 입은 관중이 입장하더니 경기장 전체가 붉게 물드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 됐다!" 2002년은 그 자체로 뜨거웠다.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죽음을 촛불로 추모하며 모인 사람에게도, 노란 저금통으로 대선 판도를 뒤흔들었던 노사모에게도 2002년은 뜨거운 열정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광장과 참여의 한가운데에 2002년 월드컵이 있었다. 국민 전체를 붉은악마로 이끈 당시 붉은악마 응원단장 유영운씨(44)는 "전에는 밖으로 나오자고 하면 머뭇거리던 사람들에게 월드컵이 광장으로 나오는 시작점이 됐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지난 12일 서울 가산동 가산디지털단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유씨를 만났다. 2002년 붉은악마의 응원을 지휘하던 그는 이제 더블유원코리아라는 스포츠마케팅 전문 업체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취미가 일로 연결되는 행운까지 거머쥔 유 대표와 대화하는 동안 시계는 2014년에서 2002년으로 되돌아갔다. 다음은 유 대표와의 일문일답.

―붉은악마는 어떻게 시작됐나.

▲2002년 당시에는 프로축구 서포터스 문화가 발전했었다. 나도 연고는 없지만 포항스틸러스를 좋아해 서포터스 활동을 했다. 10개 구단의 프로축구 서포터스 외에 국가대표 응원단인 붉은악마가 있었는데, 한국이 개최하는 월드컵을 앞두고 각 구단 서포터스들이 붉은악마에 힘을 보탰다. 8개 구단의 응원단장이 붉은악마에 소속됐는데 그중 내가 응원단장을 맡게 됐다. 그때 기록한 가장 좋은 성적이 아직도 안 깨지고 있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것이다. 붉은악마는 1995년 PC통신 축구동호회에서 출발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즈 클럽(Great Hankuk Supporters Club)'이라는 임시 이름으로 프랑스월드컵 예선부터 조직적 응원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붉은악마'라는 명칭은 1997년에 확정됐다. 붉은악마에는 사무국, 사업국, 미디어담당, 재정 등 많은 조직이 있었고 그중 응원을 내가 담당했다. 수만명을 이끄는 응원단은 20명 내외였다. 그중 일부는 평소에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 차례씩 K-리그 경기장에서 수천명의 응원을 리드하던 서포터스 응원단장들이다. 그래서 경기 흐름을 읽으면서 적절한 응원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기자의 집에도 'be the reds' 티셔츠가 있었다. '빨강'에 대한 콤플렉스를 완전히 깼다.

▲상징색인 붉은 색 티는 응원단장으로 60경기 정도 해외원정을 다니면서 응원의 위압감이 상대를 주눅들게 하고 경기력을 떨어뜨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제안한 것이다. 같은 색 옷을 입는 것이 시각적으로 효과가 크고 응원을 하는 사람도 같은 색 옷을 입어야 외치기 시작한다. 월드컵을 1년 정도 앞두고 응원을 준비하면서 기업에서 붉은 티를 후원받아 '비더레즈' 캠페인을 시작했다. 붉은악마는 따로 회비를 내는 조직도 아니고 기업의 후원을 현금으로 받는 일도 없다. 그래서 대신 붉은 티를 받았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무료로 나눠줬다. 붉은 색이 그렇게 대중적이지도 않고 우리나라로서는 꺼리는 면도 있었는데 전 국민이 동참하고 열광할 줄은 몰랐다. 레드콤플렉스가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축구장에 전부 빨간 옷을 입고 오는 것을 보고 '다 됐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그 사람은] (3) 2002년 ‘붉은악마’ 단장, 12년이 흐른 지금은..
유영운씨의 2002년 월드컵 당시 응원 모습.


―카드섹션이나 '대~한민국' 구호 등 여러 가지가 화제였는데.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국제적인 행사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위협이지만 우리는 좋은 게 뭘까 생각하다가 김덕수 선생님을 찾아갔다. 꽹과리 소리는 외국인들이 소름끼치게 싫어하지만 우리는 좋아하고 선수들도 무척 좋아한다. 무엇보다 소리가 멀리까지 나가기 때문에 경기장을 지배할 수 있다. 무턱대고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찾아갔더니 개런티도 없이 해외 일정도 모두 취소하고 전 경기 응원을 함께해 줬다. 카드섹션 응원도 크게 성공했다. 그때 메시지팀이 따로 있었는데 응원단장인 나에게도 안 가르쳐줄 정도로 보안이 대단했다. 그런데 카드섹션 한 번 하는 데 종이만 몇 천장이 필요했다. 아이디어는 있는데 어떻게 실행할까 고민하다가 천안에 있는 한솔제지 공장에 무작정 찾아갔다. 카드섹션 응원을 해야하는데 종이도 돈도 없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사보용 사진 한 장만 찍고 대외 홍보도 하지 못했지만 흔쾌히 협찬했다. 붉은악마가 중심이 돼서 했지만 여러 가지 도움이 없었다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다.

―당시 붉은악마가 해냈던 일이 대단했다. 전 국민을 이끌기도 했고 그 열기가 광장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시각도 있다.

▲붉은악마 응원단의 가장 큰 특징이 국내나 해외 상관 없이 경기장 청소를 한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항상 그렇게 했다. 그런데 광장에서 응원하던 분들이 본인들도 붉은악마라고 생각했는지 청소를 하기 시작하더라. 응원 꽃가루를 뿌려도 있던 자리가 깨끗했다. 그걸 보면서 붉은악마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사회적으로도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는 더 큰 보람이다. 교민들이 응원단을 찾아와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다고 말해줄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이 멍석 깔아주면 망설인다고, 나서자고 해도 좀 머뭇거리는 분위기였는데 월드컵이 함께 모여서 같이 즐기는 문화를 익숙하게 만든 측면은 있다고 본다.

―대형 태극기 응원도 기억난다. 태극기가 가진 근엄함을 해제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뜻깊었던 기억도 대형 태극기 응원이다. 태극기 크기가 가로 40m, 세로 30m다. 인천문학경기장에서 펼쳤더니 1층 천장을 넘길 정도였다. 정말 많은 반대가 있었다. 비용도 많이 들고 크기도 문제지만 특히 태극기가 구겨지고 더럽혀지기 때문에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만큼 태극기를 근엄한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 때였다. 붉은악마 내에서도 나 빼고 몇 명만 찬성했는데 그대로 밀어붙였고 결과는 아시다시피 대성공이었다.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태극기 밑에서 3000명 정도가 밖을 못 본다는 것도 걱정했는데 불평은커녕 '그 밑에 있었다, 태극기 끝부분 잡았다'면서 자랑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전환했다는 점도 큰 의미다.

―본인에게 2002년은 어떤 의미인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 것 같은가.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축구 경기가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응원을 다녔는데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현재 회사로 이직했다. 월드컵이 인생을 바꾼 것이다. 이직 1년 후에는 당시 회사 대표가 여자축구연맹 회장을 맡으면서 사무국장을 하게 됐다. 6년 정도 축구 행정업무를 하면서 선수들의 경기력도 중요하지만 좋은 환경 제공과 저변 확대가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는 대표직까지 맡게 됐는데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라는 슬픈 상황 속에서 치러지는 월드컵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세월호대책위원회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즐겨라 대한민국'이라는 로고를 쓰면서 거리응원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들었다. 응원을 통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그러면서도 또 애도의 마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wonder@fnnews.com 정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