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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버냉키노믹스

[곽인찬 칼럼] 버냉키노믹스

7·30 재·보선 결과에 가장 흐뭇한 사람은 누구일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빼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정책이 첫 여론 검증대를 본때 있게 통과했으니 말이다. 야당이 스스로 죽을 쒔지만 그렇다고 여당이 예뻐서 이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의 일등공신은 최 부총리라는 말이 나온다.

최 부총리의 정책은 흔히 한국판 아베노믹스에 비유된다. 단호한 의지로 화끈한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최 부총리는 아베 총리와 닮았다. 아베 총리는 20년 동안 축 처졌던 일본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최 부총리 등장 이후 국내 증시·부동산 시장에도 생기가 돈다.

최경환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기본적으로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실세다. 동시에 집권당 원내대표를 지낸 3선 중진급 현역의원이다. 대한민국의 최상위 권력은 청와대와 국회에 있다. 최경환은 그 둘을 다 갖고 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군소리 없이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정책을 양보했다.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도 다음주 기준금리를 내릴 것이란 관측이 높다. 최 부총리는 2기 경제팀 사령탑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뭐니뭐니해도 최경환의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관료로 출발했지만 최근 12년은 정치인으로 살았다. 누구보다 여론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는 재·보선에서 '빅 푸시(Big Push)'를 바라는 여론을 확인했다. 그의 부양책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게 틀림없다.

경제 정책엔 백점도 없고 빵점도 없다. 많은 경우 정책은 선택의 문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부양을 택했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지도에 없는 길을 갔다. 그는 달러를 찍어 시장에 뿌리는 파격적인 통화정책 카드를 꺼냈다. 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세상은 깜짝 놀랐다. 저러다 미국이 큰코 다칠 거라는 둥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이 위태로울 거라는 둥 비판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떤가.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의 진앙이면서도 파국을 면했다. 달러의 기축통화 위상도 별 손상을 입지 않았다. 버냉키 전 의장은 사후관리도 철저했다. 돈을 푸는 부양은 필연적으로 거품을 초래한다. 그래서 버냉키는 선제적 안내(Forward Guidance)를 통해 장차 연준이 언제 어떻게 거품을 뺄 것인지 시장에 알렸다. 실제 작년 12월부터 양적완화 규모를 100억달러씩 줄이는 테이퍼링 정책을 착착 밟아가고 있다. 그 덕에 뉴욕 증시는 당황하지 않고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 중이다.

외환위기 때 한국은 180도 다른 길을 갔다. 전주(錢主) 국제통화기금(IMF)이 시키는 대로 엄격한 긴축 아래서 형극의 길을 걸었다. 금을 모으고 허리띠를 졸라맨 덕에 구제금융 조기졸업 우등상을 받았다. 한국을 보면 긴축 처방도 효과가 있고, 미국을 보면 부양 처방도 효력이 있다. 좁은문을 통과한 우리로선 좀 억울하지만 케인스 식의 경기부양책도 괜찮은 정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다. 부양엔 돈이 든다. 돈이 모자라면 빚을 낸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과다한 부채 자금의 유입은 때때로 경제성장과 호황의 혜택보다 더 큰 체계적 위험을 불러온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신용 버블'에 도취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수많은 정책 당국자들이 "이번엔 다르다"고 말하지만 지난 800년간 66개국에서 일어난 금융위기를 보면 과다 부채는 늘 위기를 부른다는 게 로고프 교수의 결론이다('이번엔 다르다').

이제 막 부양 카드를 꺼낸 최 부총리의 진로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이왕 할 거면 단호하게 밀고 나가라. 하지만 빚의 엄중함만은 늘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사실 LTV·DTI 규제를 푼 것은 모험이다. 자칫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다.
최 부총리는 아베노믹스보다 버냉키노믹스를 벤치마킹하면 좋겠다. 아베노믹스는 아직 성패가 불투명하다. 반면 버냉키노믹스는 대범한 부양 후 거품을 제거하는 애프터서비스 요령까지 친절하게 제시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