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비치며/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초등학교 때의 동요 '등대지기'다. 이 노래에 등대지기의 역할이 담겨 있다. 이후로 등대지기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37개의 유인등대가 있고 114명이 하루도 빠짐없이 24시간 돌보고 있다. 지난 8월 27일 오후 기자가 인천에서 여객선을 타고 4시간을 달려찾은 서해 백령도 인근의 소청도 등대에서는 14년차 정운섭 주무관(44)과 2년차 김진호 주무관(35)이 등대를 지키고 있었다.
【 소청도(인천)=윤경현 기자】 선착장에서 등대까지는 약 4㎞로, 자동차로 10분 이내 거리다. 날씨도 좋은데 소청도의 경치를 구경할 겸 해서 걸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치기'였음을 깨닫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등대로 가는 길이 가파른 언덕에 이은 언덕, 그리고 또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등대는 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깜깜한 밤바다를 떠다니는 배들을 위해 존재한다. 먼 바다에서도 빛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섬의 끝자락,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등대지기는 사양, 등대관리원으로"
정 주무관은 "'등대지기'라는 호칭 대신 항로표지관리원이나 등대관리원으로 불러줬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등대'라는 단어도 잘 쓰지 않는 데다 엄연히 전문자격증을 보유한 전문직이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정 주무관과 김 주무관은 항로표지관리사 자격증 이외에 전기·무선설비 등의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 주무관은 "'등대지기'라는 동요가 없어지지 않는 한 등대지기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오후 6시가 가까워오자 정 주무관과 김 주무관이 사무실 안으로 연결된 64개의 계단을 이용해 등명기(빛을 뿜어내는 기기)쪽으로 올라갔다. 청소를 하기 위해서다. '파리판'으로 불리는 외부 유리는 각종 새들이 날아드는 탓에 자주 청소해줘야 한다. 지난 밤 등명기의 밝은 불빛을 보고 달려들다 죽은 새가 20여마리에 달했다. 대청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파리판 안의 '프리즘렌즈'는 지난 1908년 소청도 등대가 생기면서부터 사용해온 것이다. 이 프리즘렌즈 내부에 타조알 만한 400W짜리 메탈헬라이트전구가 들어 있다. 소청도등대의 밝기(광도)는 150만칸델라(㏅)다. 촛불 150만개를 켜놓은 것과 같은 밝기로 30㎞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정 주무관은 "4개의 볼록렌즈로 이뤄진 프리즘렌즈가 회전을 하면서 20초 동안 네 번 같은 곳을 비추게 되고 20초는 깜깜한 상태(40초 4섬광)가 된다"며 "가까이서는 빛이 기둥처럼 보이지만 멀리서는 깜빡거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등대마다 불빛이 깜빡이는 간격이 달라 그것만으로도 어느 등대인지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외로움과의 싸움의 연속
이날 야간근무는 김 주무관이 맡았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오후 7시께 김 주무관이 등명기에 불을 켰다. 지금부터는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김 주무관은 "등명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근무자체가 힘들지는 않다"며 "다만 늘 혼자서 밤을 새워야 하는 일이라 성격에 맞지 않으면 버티기가 쉽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한편에 '관계자외 출임금지'라는 푯말이 붙은 별도의 방이 있다. 내부에는 안개로 등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사용하는 무신호기와 배의 위치를 알려주는 위성항법보정시스템(DGPS)이 설치돼 있다.
무신호기는 세 방향으로 각각 200W짜리 스피커 4개가 달려 있다. 5초 동안 음파를 내고 40초 쉬기를 반복하는데 5㎞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김 주무관은 "소청도는 1년 중 3분의 1은 안개가 낄 정도여서 무신호기가 꼭 필요하다"며 "등대에서 바다의 상황을 가늠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마을주민들이 '안개가 심하다'고 알려준다"고 말했다.
DGPS는 자동차에 달린 GPS처럼 날씨에 상관없이 위치, 속도 등을 측정하는데 필요하다. GPS보다 한층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DGPS가 있는데 등대가 왜 필요할까'라고 물었다. 김 주무관은 "북한에서 방해전파를 쏠 경우 배들이 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등대"라며 "무인등대는 고장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 날씨가 안 좋을 경우 고장난 상태가 며칠이나 유지될 수 있다"고 답했다.
김 주무관은 1시간에 한 번꼴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등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대청도에 설치된 등표는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날도 아무런 문제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사무실 안에서는 등대불이 잘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다"며 "원래는 등명기도 자동으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타이머가 있지만 그마저도 안하면 지나치게 나태해질 것 같아 없애버렸다"고 설명했다.
어느덧 바깥이 밝아왔다. 시곗바늘이 오전 6시50분을 가리키자 김 주무관이 등명기의 불을 껐다. 그는 "원래 해가 지기 5∼10분 전에 켜고 해가 뜬 후 5∼10분이 지나서 끈다"며 "겨울에는 오전 7∼8시까지 켜놓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근무일지를 살펴보니 올해 들어 가장 길게 켠 날은 1월 초로 14시간40분(오후 5시15분∼오전 7시55분), 가장 짧게 켠 날은 7월 초로 9시간25분(오후 7시55분∼오전 5시20분)이었다.
■제초작업·차량 수리 등 생활이 업무
소청도등대를 관리하는 인원은 모두 3명이다. 2명이 근무하는 동안 나머지 1명은 휴식을 즐긴다. 통상 한 달에 22일을 일하고 최대 9일을 쉰다. 토·일요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내는 셈이다. 항로표지관리소 내에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숙소가 마련돼 있지만 너무 외진 곳이어서 가족들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청도에는 구멍가게조차 없다. 그래서 육지에 사는 가족의 품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면 20여일분의 먹을거리를 준비해 와야 한다.
등대에서는 생활 자체가 업무의 연속이다. 먹는 것은 물론 등대와 사무실 청소, 진입로 보수 및 제초 작업, 업무용 차량 수리까지 등대관리원들이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 진입로라고 해봐야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지만 풀이 워낙 잘 자라기 때문에 1년에 두 번 하는 제초작업도 여간 고되지 않다.
정 주무관은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는데 바람까지 더해져서 '치우면 또 쌓이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며 "지난 2012년 겨울에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 1m를 치우는데 서너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등대가 마을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탓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한다. 지난해 북한이 미사일 사격 연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대피방송을 듣고 모두 방공호로 대피했다. 하지만 등대까지는 대피방송이 들리지 않아서 다음 날 마을에 들러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 주무관은 "정말 다급한 경우에는 마을주민들이 전화를 주는데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고 전했다.
등대관리원들은 2년마다 순환근무를 한다. 인천해양항만관리청에는 소청도와 팔미도, 부도, 선미도에 유인등대가 있고 등대관리원들은 등·부표를 관리하는 부서 등을 포함해 총 6곳을 돌아가며 근무한다. 정 주무관은 이번 추석이 지나면 부도등대로, 김 주무관은 팔미도 등대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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