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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무상'은 공짜가 아니다

[노동일 칼럼] '무상'은 공짜가 아니다

"아무런 대가(代價)나 보상(補償)이 없이 거저임."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무상(無償)의 뜻이다. 무상복지를 둘러싼 논란의 근원에는 이처럼 무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 밥을 먹이고 아이를 돌보고 병을 치료하려면 돈이 든다. 내가 내지 않아도 누군가 내야 한다. 당장 내지 않아도 언젠가는 내야 한다. 거저 주어지는 급식·보육·의료는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이 쟁점이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의 이념논쟁, 진영싸움이 달아올랐다. 당시에 나는 무상 개념의 오류를 지적했다. 무상은 공짜라는 말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장 돈이 들지 않아도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 다른 지출을 줄여야만 무상급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혜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무상급식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비판의 초점이 달라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후보가 공약으로 들고 나온 게 무상복지 확대였기 때문이다. 무상보육, 무상의료, 기초연금, 거기에 반값등록금까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후보들의 공약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증세 없이 복지 확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 역시 공통적이었다. 그 점이 나의 비판의 대상이 됐다.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모든 복지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무상은 공짜'처럼 국민을 호도하는 일이라고.

따라서 급식과 보육 예산을 둘러싼 복지논쟁은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뒤늦은 탄식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지만 귀 막은 정치인들이 앞장서고 눈 감은 국민이 따라간 길 끝에 벼랑이 나타난 것이다. 이제라도 돌이킬지, 아니면 그래도 한번 떨어져 보자고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학교급식은 교육을 포함한 지방자치의 영역이다. 형편이 좋은 지자체는 예산을 지원하고, 형편이 안 좋은 경우는 지원하지 못할 수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정치적 목적이든 아니면 순전히 돈 때문이든 지원을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끝까지 거부할 경우 정치적 책임을 물으면 된다. 다음 선거도 있고 주민소환제도 있다. 반면 보육은 법령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다. 애매하긴 해도 영유아보육법과 시행령에 근거가 있다. 보건복지부와 함께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지자체나 교육청이 예산편성을 거부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로 인해 진영논리에 따른 이념논쟁이 재연되고 있는 점이다. 여야,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복지 확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이제 와서 보편적 혹은 선별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이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연금 가운데 일부는 보편적이고 일부는 선별적이다. 다만 모든 것을 하기에 돈이 모자랄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누가 시작했느냐, 좌파냐 우파냐는 다툼이 아니다. 어떤 복지를 얼마만큼 어느 정도의 속도로 할 것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무상'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공짜나 거저는 없다는 것이다.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국민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두 번째는 복지 확대를 원한다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무상이 공짜인 것처럼, 세금이 화수분인 것처럼 속인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다.
모른 척하며 벼랑 끝까지 따라온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선택은 달라야 한다. 벼랑에서 떨어져봐야 아픈 줄 알고, 난로에 손을 대봐야 뜨거운 줄 안다면 그게 바보지 달리 바보가 아니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