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양(哀絶陽)과 비정상의 정상화- 병무청장 박창명
한 여론조사에서 '인사청문회 도덕성 검증에서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50%가 '병역'이라고 답했다는 언론보도를 본적이 있다. 그만큼, 많은 국민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갈 고위공직자의 병역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일 것이다. 문득 병무청 역사기록관에 게시돼 있는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이 생각났다.
"시아버지는 이미 죽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할아버지·아들·손자 3대가 군적(軍籍)에 실렸으니, 달려가 호소하나 동헌 문에는 호랑이요. 이정(里正)이 호통치며 남은 소마저 끌고 가네. 남편이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자식 낳아 군액 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부호들은 1년 내내 풍악을 울리면서, 쌀 한 톨, 베 한 치 내는 일이 없으니, 똑같은 백성을 두고 왜 이리 차별일까?"
조선시대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가혹하게 부과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주요부위를 자르는(絶陽) 참혹한 일이 벌어지지만 정작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부호들은 세금 한 푼 안 내는 기막힌 그 당시 세태를 시로 표현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병역의무는 존재해왔고 병역을 기피하려는 시도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책임이 있는 고소득층이나 사회지도층 인사, 연예인·체육인 등이 연루된 병역비리는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켜 계층 간 위화감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돼왔다.
내 아들은 전방에서 성실히 나라를 지키고 있는데 소위 있는 사람들의 자제 중 일부는 국적이탈 등 다양한 사유로 병역이 면제되는 사례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 모른다. 더욱이 최근 군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로 자녀를 군에 보낸 부모들은 신(新) 애절양(哀絶陽)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범죄심리학에 작은 무질서를 방치하면 나중에 더 큰 사고나 범죄로 이어진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공운동장애 위장, 정신질환 위장, 어깨 탈구, 환자 바꿔치기 등 의사까지도 속이는 신종 병역면탈 행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병역제도 안에 숨겨진 깨어진 유리창을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 결과라 생각된다.
병무청에서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오는 잘못된 관행과 제도 등 비정상적인 시스템을 개선하고 있다. 먼저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를 이용한 병역면탈 행위를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고위공직자와 그 직계 비속, 유명 연예인, 체육인 등 사회 관심자원의 병역사항 집중관리를 추진하고 있다. 또 갈수록 다양화·지능화·고도화되는 병역면탈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병무청 직원의 특별사법 경찰권제도를 도입했다. 병역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는 생계곤란 병역감면제도를 시대 상황에 맞게 개선하고, 등록장애인의 징병검사 제외기준도 정비했다.
이 밖에 최근 형평성 논란이 대두되고 있는 예술·체육요원제도도 편입 후 재능기부 의무화 등 국민의 정서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선 중이며, 더욱 안전한 병영환경 조성을 위해 정신과 정밀검사 대상자를 보다 더 정확히 선별할 수 있도록 심리검사 전문인력 증원과 종합심리검사 제도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 열 명이 있어도 도둑 한 명을 막기 어렵다'는 속담처럼 제도와 시스템 개선만으로는 병역면탈 범죄행위를 완전히 근절하기는 어렵다. 또한, 제도의 틈새를 합법적인 병역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는 시도를 막아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나와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국민 된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동반돼야 한다.
특권과 편법을 배제하고 법과 원칙을 준수하는 공정한 사회, 기본이 바로 선 사회, 병역을 이행한 사람이 우대 받는 사회구현을 위해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한 이유다. 수 백 년 간 이어져온 병역면탈 범죄의 고리를 끊어 병역이 더 이상 부모들의 신체를 끊어내는 아픔과 슬픔이 아닌 자부심과 명예, 자랑이 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문화 조성에 전 국민의 참여와 응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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