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충북)=윤경현 기자】 지난해 12월 초 시작된 구제역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방역당국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돼지에서 소로 옮겨가며 오히려 전선이 확대되는 모양새다. 축산 농가들은 지난 2010년과 2011년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당시 가축 수백만마리가 매몰 처분됐었다.
지난 10일을 기준으로 전국의 구제역 발생농가는 모두 43곳으로, 살처분된 돼지는 3만2000여마리에 이른다. 특히 충북 지역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한 달여 만에 진천·청주·증평·음성·괴산 등지의 축산농가 23곳에서 구제역이 발생했고 2만마리가 넘는 돼지가 땅 속에 파묻혔다. 지난 6일 충청북도 축산위생연구소 방역과를 찾아 구제역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방역관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연말연시는 돼지와 함께
지난 2005년 방역관이 된 변현섭 주무관(37)과 공중방역수의사로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고 있는 이주원 수의사(31)는 '을미년' 새해를 돼지들과 함께 맞았다.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라는 문구는 잊은 지 오래다. 변 주무관은 "요즘은 구제역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덕분에 밤 11∼12시에는 퇴근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새벽에도 긴급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여서 가족들의 원망이 이만저만 아니다"라고 말했다.
24시간 비상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탓에 야간에도 자리를 지킨다. 마땅히 아이를 맡길 데가 없는 여성 방역관의 경우 가족 전부가 사무실에 나와서 밤을 보내기도 한다. 변 주무관은 "30대 중반의 총각 방역관은 선을 보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다가 연락을 받고 다급하게 출동한 적도 있다"며 웃었다.
신고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시간은 오후 7∼8시다. 보통 농장에서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는 시간이 오전 8∼10시, 오후 4∼6시인데 이때 돼지들의 건강도 함께 살피게 되고 이상이 있다고 의심되면 신고를 한다. 신고가 들어오면 방역관들은 무조건 달려가야 한다. 변 주무관은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가면 오후 9시, 시료채취를 끝내면 오후 10시를 훌쩍 넘긴다"며 "다음 날 새벽이 되면 인력과 장비를 구하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칙적으로는 2명의 방역관이 함께 나가 1명은 구제역이 발생한 축사, 다른 1명은 발생하지 않은 축사를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인력이 부족한 탓에 혼자서 모두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변 주무관은 "구제역이 한창일 때는 말 그대로 전쟁에 가깝다"며 "한 사람이 살처분 이전 농장 1곳, 살처분을 완료하고 임상관찰 중인 농장 1∼2곳 등 모두 2∼3곳의 농장을 동시에 맡아야 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제역이 가장 심했던 2011년에는 약 3개월간 지속됐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신고가 7∼8건씩 들어왔었다"며 "이 농장, 저 농장을 다니다 보니 하루 이동거리가 200㎞에 이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과거에는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모두 도맡아 했었지만 지금은 인력시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데려다 쓴다. 특이한 것은 돼지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무서워한다'는 점이다.
"농장에서 키우는 돼지는 TV나 사진에서 보는 작고 예쁜 돼지가 아닙니다. 덩치가 커요. 보통 한 마리의 무게가 120㎏ 정도입니다. 한 사람이 한 마리 통제하기가 버거워요. 게다가 똥을 뒤집어쓰고 있어 시커멓습니다. 이런 돼지들이 사람이 들어가면 호기심에 막 달려듭니다. 누가 봐도 무서울 수밖에 없어요."
변 주무관은 "급하게 이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오다 보니 종교 등을 미리 확인할 여유가 없다"면서 "한 번은 인부 4명 가운데 2명이 돼지와 특수관계에 있는 무슬림이어서 이들을 돌려보내고 대체인력을 구하느라 작업이 한참 지연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잠잘 곳도, 먹을 것도 열악한 현장
대낮인 데도 축사 안은 어두컴컴하다. 별도의 난방장치가 없는 마당에 추위와 바람을 막느라 커튼 같은 것을 사방으로 쳐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돼지들이 싸놓은 똥으로 인해 발목까지 '푹푹' 잠긴다. 장화 위로 덧신을 두세 겹씩 겹쳐서 신어보지만 축사를 나올 때면 하나도 없다. 이 수의사는 "돈사 안은 의외로 따뜻하다. 시료채취(채혈 등)를 위해 방역복을 입고 들어가서 돼지와 씨름하다 보면 등에 땀이 줄줄 흐른다"며 "하지만 돌아서 축사를 나오면 추위 탓에 방역복이 그대로 얼어버리곤 한다"고 거들었다.
변 주무관이 "암모니아 가스가 아주 지독해서 30분가량 돼지와 승강이를 벌이다 보면 폐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라며 "냄새가 몸 전체에 배기 때문에 집에 가면 아이들이 근처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거들었다.
구제역 발생 현장에 나오면 최소한 사나흘, 길면 일주일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식주를 해결하기조차 힘들다. 축사가 농가와는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잘 데가 없어 자동차 안에서 자고, 컨테이너박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지내기도 한다. 세수도 못하고, 양치질은 호사에 속한다. 들어갈 때 말끔하던 얼굴이 나올 때는 꾀죄죄한 몰골에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자라 '거지꼴'이 되기 일쑤다.
식사는 주로 외부에서 배달을 시켜서 먹는다. 챙겨줄 사람도 없고 챙겨먹을 형편도 안된다. 변 주무관은 "초기에는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라면에 물로 배를 채운 적도 있고, 심지어 물 한 잔 먹기도 힘들 때도 있다"며 "식사를 담아온 바구니도 오염 가능성이 있어 바닥에 함부로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황은주 방역과장(57)은 힘든 여건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그는 "전쟁터에서 호텔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공직자로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위로했다.
방역관도 사람인지라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변 주무관은 "처음에는 '사람 때문에 애꿎은 돼지들이 다 죽는구나' 싶어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뎌진다"고 했다. 이 수의사는 "명색이 동물을 살리는 직업인데 어쩔 수 없이 살처분을 해야 하니까 마음이 아프다"며 "특히 아직 어린 새끼들을 매몰 처분할 때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1년 간 두 달 빼고 늘 비상대기
최근 몇 년 새 대규모 구제역이 반복해서 발생하다 보니 방역관들도 방역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변 주무관은 "지난 1년간은 7∼8월 두 달을 제외하고는 늘 비상대기였다"면서 "지난해 1월 중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가 여름에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가을이 되면서 되살아났고 연말에는 구제역이 덮쳤다"고 설명했다. 황 과장은 "과거에는 구제역이 한겨울에만 발생했으나 경북 지역에서 지난해 8월에도 발생한 것을 보면 이제 계절적인 요인은 초월한 것 같다"며 "사육환경이 열악하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축산농가는 잘 키워서 소득을 내는 게 아니라 인건비를 줄여 수익을 내는 후진적 구조"라며 "외국인 노동자들을 주로 쓰기 때문에 위생관념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구제역이 다른 곳으로 확산됐을 때 받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다. 황 과장은 "빨리 끝내야 하는 것이 방역관들의 책임이지만 마치 방역이 제대로 안돼서, 방역을 제대로 못해서 확산되는 것처럼 비쳐질 때는 당황스럽다"고 했다. 그는 또 "백신만 정확하게 맞히면 예방이 가능하지만 최근 3년간 축산농가들이 이를 소홀히 여긴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구제역 백신 접종을 회피하는 등 안일하게 대처하는 축산농가의 관행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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