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수사기관에서 복제·출력할 경우 영장에 적힌 혐의와 관련된 자료만 다뤄야 하며, 이 과정에 당사자나 변호인이 참여해야 한다는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여러 정보가 섞인 디지털 증거의 압수수색 요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대법원의 첫 판단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A제약사 B회장의 디지털 증거를 압수수색한 수원지검의 절차가 위법하므로 취소해야 한다고 결정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앞서 수원지검은 2011년 4월 B회장의 약사법 위반·조세범처벌법 위반 혐의와 관련된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당시 검사는 B회장의 동의를 받아 컴퓨터 하드디스크 자체를 봉인해 대검찰청 디지털 포렌식센터에 인계해 저장된 파일을 복제했고, B회장은 과정을 일부만 지켜보다 자리를 떴다.
검사는 이후 대검에서 복제한 파일을 다시 자신의 외장 하드에 복제한 후 파일을 수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B회장의 혐의와 무관한 정보들도 함께 출력됐고 B회장은 이 과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이후 B회장은 "이같은 압수수색은 위법하다"며 법원에 준항고를 제기했고, 수원지법이 이를 받아들여 B회장에 대한 압수수색 전부를 취소하라고 결정하자 이번에는 검찰이 불복해 재항고를 냈다.
대법원은 반출된 저장매체나 복제본을 수색할 때도 현장 압수수색과 마찬가지로 영장 혐의와 관련된 부분만 한정해 자료를 추출해야 한다고 제한했다.
대법원은 "전자정보는 복제가 쉬워 저장매체나 복제본이 압수수색 과정에서 외부로 반출되면 압수수색이 종료된 뒤에도 복제본이 남아있을 수 있다"며 "이 경우 혐의사실과 무관한 정보가 수사기관에 의해 다른 범죄의 수사단서나 증거로 위법하게 사용되는 등 새로운 법익침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자정보가 담긴 저장매체나 복제본을 수사기관에 옮겨 복제·탐색·출력하는 경우에도 당사자나 변호인에게 참여의 기회를 보장하고, 혐의사실과 무관한 전자정보의 임의 복제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등 영장주의 원칙과 적법절차를 준수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또 전자정보 수색 과정에서 영장에 적히지 않은 다른 범죄 혐의와 관련된 정보가 발견됐다면 그 자리에서 즉시 수색을 중단하고, 법원에서 별도로 영장을 발부받아야만 한다고 밝혔다.
하드디스크 자체를 반출해 대검에 넘겨 복제한 것까지는 적법하다고 봤지만, 그 이후 검사가 별도로 재복제해 혐의와 관련없는 자료까지 출력한 것은 위법하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다만 현장 압수, 이미징, 출력 등 수사기관의 처분은 하나의 영장에 의해 이뤄지므로 이같은 과정 전체를 취소해야 한다고 결정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봤다.
이에 김창석·박상옥 대법관은 일부 절차가 위법했더라도 영장에 적힌 범죄혐의와 관련된 압수수색까지 모두 취소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당사자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은 조치가 위법했어도, 영장에 적힌 정보는 피의자나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어서 이 부분까지 모두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권순일 대법관은 대검에서 복제한 부분은 적법한 절차를 따랐으므로 이후 절차가 위법했다고 소급해 모두 취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hiaram@fnnews.com 신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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