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사다. 평소 일상 속에서 별 자극을 못 느끼던 뇌가 색다른 이국적 풍광과 문물을 접하면 갑자기 격렬하게 반응한다. 현장의 참신성에 따라 뇌 반응의 진동 폭이 달라지기도 한다. 7월 하순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이뤄진 8일간 그리스 답사는 오디세우스의 항해처럼 긴 여정은 아니었지만, 그의 항해에서와 같은 강한 충격과 환상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3000여년 전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 유물인 뱀 여신상, 고래와 물고기를 새겨 놓은 도자기 그리고 아가멤논 왕의 도시 미케네의 무덤에서 발굴된 황금가면 등 화려한 에게문명의 유산은 2주가 흘러간 지금도 나를 꿈속에서 헤매게 한다.
그리스 위기는 서방 언론의 허풍으로 여겨질 만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크레타섬 이라클레온 중심가는 밤늦게까지 포도주 잔을 기울이는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쳐났다. 아테네에서 수니온의 포세이돈 신전으로 가는 해안선 도로 아래에는 해수욕하는 사람과 요트가 곳곳에 눈에 띈다.
이런 낙천성을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기 나라의 국민성으로 보았던가.
최근 위기의 심화 원인을 그리스인의 나태와 무책임에 귀착시키며 이를 '조르바적(的) 삶'이라고 비꼬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조르바는 카잔차키스가 찾은 그리스인이지만 그 삶은 인간 존재의 밑바탕에 깊게 깔려 있는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시시포스가 산 정상에 애써 밀어올린 바위가 다시 바닥으로 굴러내려 가는 것처럼 허망한 것이 인생이라면 차라리 삶의 부질없음을 관조하면서 느긋하게 이를 즐기는 조르바적 삶이 외려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지. 산다는 건 지금 여기를 누리는 것일 뿐이라는 조르바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이라클레온에 있는 카잔차키스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산 티셔츠에 새겨진 그의 묘비명 마지막 구절인 '나는 자유인'이 바로 이 의미가 아닐까.
그리스 중부 내륙은 강우량이 적고 바람이 드세게 불어 키 작은 나무와 바위뿐인 돌산 천지이고 간혹 목동들이 다니는 구불구불한 산길이 보인다. 테바이 왕자 오이디푸스가 코린도스를 떠나 테바이로 오던 중 우연히 만난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인 곳이 저 돌산 길 어디쯤일까.
미케네에서 한참 돌산 길을 끼고 오르내리다 보니 드디어 2457m 파르나소스산 남쪽 경사면 중턱 고원에 있는 뱀의 신 피톤의 땅 델포이다. 우주에서 땅의 정기가 가장 충만해 있다는 지구의 배꼽 델포이는 무척 인상적이다. 아칸서스 풀잎을 부조해서 달팽이처럼 꼬아 넣은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신전 기둥 사이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쭉 뻗어 있고, 그 아래 산에는 양떼 몰이가 다니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는 것 외에는 온통 올리브나무 바다다. 저 멀리 코린트만 항구의 불빛이 반짝이고, 카페에서 애잔한 그리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리스 전통 술 치푸로를 한 잔 하는 기분은 가히 환상적이다. 밤의 향연(symposion)에는 양고기 꼬치구이와 치푸로가 빠지지 않았다.
화산군도 산토리니의 칼데라는 바다 쪽으로 크게 형성되어 섬 쪽으로는 붉고 검은 화산재로 절벽을 이루고 있다. 에게해에 몸을 담그니 상쾌하다.
석양 무렵 바다는 붉은 물결로 반짝이고, 파란색 돔과 하얀 벽의 정교회 건물이 푸른 하늘 아래 더욱 선명한 색깔을 드러낸다.
서서히 어둠이 깔리면 칼데라 안 크루즈선 불빛이 쪽빛에서 검게 변한 바다에 어른거리고 초승달 빛에 젖은 에게해는 은색으로 빛난다. 동트기 전 한 시간 남짓 어둠 속을 트레킹하면서, 언덕 위 교회 옆 소나무 숲 사이로 맞이한 산토리니의 일출은 장엄했다.
마지막 날 밤 멀리서 쳐다본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 그 은은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은 그리스를 떠나는 여행객의 발길을 오랫동안 떼지 못하게 했다. 이 신화의 나라를 보러 언제 또 배낭을 꾸릴 것인지.
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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