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에 한 승객이 앉아있다. 사진=윤지영 기자
#. 임신 4개월차인 서모씨(29)는 지하철을 탈 때면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 아이인데다 평소 체구가 왜소한 탓에 임신한 티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이 힘들때면 임산부석에 앉기도 하지만 주위에서 눈치를 줄 때면 곤혹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혹시 몰라 산모 수첩까지 갖고 다니지만 임산부 배려석을 양보 받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배려석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휴대전화 게임 등을 하며 모른척 하거나, 노인들은 오히려 "노약자를 보호해야지"라고 하는 통에 임산부 배려석이 설치된 지 2년여가 됐는데도 여전히 임산부들이 이용하기 불편한 자리가 되고 있다.
올해 7월부터는 아예 눈에 잘 띄게 분홍색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중이지만 임산부들의 불편한 상황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현재 임산부를 배려하는 정책도 좋지만 정부의 '전시성 정책'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임산부 배려석 이용을 둘러싼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문제점을 점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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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가 '눈치보는' 임산부 배려석
최근 저출산 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임산부를 위한 각종 '배려 정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정작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에 마련된 '임산부 배려석'을 임산부들이 마음놓고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임신 초기의 경우 거의 임신 티가 나지 않아 배려석 앉기가 눈치보이기가 일쑤이고, 어떤 때는 노년층 이용객에게 밀려 좌석 양보를 요구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2013년 10월부터 수도권 지하철 1~8호선에 기존 노약자석과 별개로 차량 1대당 2석씩 총 7140개의 임산부 배려석을 마련했다. 서울시는 임산부 배려석을 보다 확연히 알아볼 수 있도록 지난 7월부터 배려석 뒤쪽 벽과 좌석, 바닥 색을 '분홍색'으로 바꿨다.
하지만 아직도 정작 이를 이용해야 할 임산부들에겐 결코 편안한 '지정석'이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임신 초기에 배가 적게 불러 임신 티가 잘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들도 일반 승객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배려석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임산부들은 전철 이용객들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은 물론 평상시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기가 눈치보인다.
임신 3개월차인 정모씨(28)는 "임신 초기라 티가 별로 나지 않다보니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의 눈치가 보여 기존 노약자석에는 정말 힘들지 않는 이상 거의 앉지 않으려 한다"며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도 노인분들이나 일반 승객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용이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임산부 김모씨는 "출퇴근 시간대에는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하려해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며 "가끔 양보를 받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임산부라는 것을 말로 설명해 이해를 구해야하는 통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다"고 토로했다.
임신 2개월차인 신모씨(31)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을 때마다 사람들이 '정말 임신한 거야'라는 식의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봐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다"며 불편한 기억을 떠올렸다.
일각에선 기존 노약자석이 있는데도 임산부 배려석을 추가 지정한 것은 '전시성 정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직장인 박모씨(29)는 "이미 임산부나 노인들을 위한 노약자석이 있는데 전용석을 또하나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리 하나를 없에는 꼴"이라면서 "일주일 내내 야근을 하다보면 건장한 직장인도 힘들어 좌석에 앉아가고 싶은데 성차별을 받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다른 직장인 김모씨(30)는 "노약자석 일부를 임산부 '전용'석으로 바꾸는게 더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며 '전시성 정책'이라는 주장을 폈다.
다만 또 다른 20대 직장인 김모씨는 "일반 좌석이 다 차있어도 임산부 배려석 만큼은 가능한 앉지 않으려 한다"면서 "배려석이 생긴 뒤 임산부들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배려문화' 정착이 우선돼야
일각에선 임산부 배려석 설치도 좋지만 우선 임산부 등 약자에게 좌석을 양보하는 '배려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성가족부를 비롯해 보건복지부 등 관련 정부부처에서 대국민 캠페인을 통해 저출산 타개를 위한 임산부 배려 정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범국민 켐페인' 등을 통해 사회적 배려문화 정착에 대한 공감대를 꾸준히 확산시켜야 한다는 것.
50대 중반의 권모씨는 "아직 사람들 사이에서 임산부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임산부 배려석의 실효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서울시 관계자는 "임산부 배려석이 보다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포스터 부착과 캠페인, 지하철 내 안내방송을 꾸준히 병행해 배려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jyyoun@fnnews.com 윤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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