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1990년 인기를 끈 대중 가요인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의 첫 소절이다. 언제나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로 고객을 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자'.
자신의 감정을 숨긴채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이 '현대판 삐에로'로 불려지는 이유다. 감정노동자는 업무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외모나 표정을 유지해야 하는 근로자를 말한다.
경제 발전으로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면서 감정노동자에 해당하는 직종도 늘고 있다. 판매, 유통, 음식, 관광, 간호 등 대인서비스 근로가 여기에 해당한다.
폐단도 만만치 않다. 얼마전 백화점 점원이 고객에게 무릎을 꿇은 일은 대표적인 사례다. '손님은 왕'이라고 하지만 감정노동자들의 고충 중 하나가 바로 고객의 '갑질'이다. 욕설은 기본이고, 무시, 성희롱은 덤이다.
이로 인해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을 호소하는 감정노동자가 늘고 있다.
늦은감이 없진 않지만 정부가 감정노동자도 산업재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이낸셜뉴스는 감정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캐셔(계산원) 김지현씨(52·여·가명), 텔레마케터(전화통신판매원) 이현주씨(32·여·가명), 호텔업 종사자 박종철씨(48·가명)를 만나 이들의 고충을 들어보고, 감정 노동의 실태에 대해 진단해봤다.
■욕설, 성희롱, 무시.. 감정노동자의 고충
"개같은X아, 오늘밤 어때?, 미친X아"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이현주씨가 업무 중 가끔 듣는 고객들의 말이다. 이 씨는 통화중 고객이 욕설을 하면 그냥 "죄송합니다" 라고 얘기 하고 전화를 끊는다.
이씨의 업무가 전화를 통해 고객에게 상품 홍보와 판매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객이 욕설을 해도 참아야 하는 이유다.
텔레마케터 4년차인 그녀도 고객으로부터 욕설을 들을 때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다. 욕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가끔 성희롱을 일삼는 고객을 대할 때는 여성으로서 정말 수치스럽다. 전화로 신음소리를 내면서 "오늘밤 어때", "오늘 내가 죽여줄게" 등 입에 담기도 낯부끄럽다.
이런 이유로 이씨는 한때 우울증까지 앓았었다.
이씨는 "고객들이 성희롱할 때는 정말 심장이 '쿵' 하는 느낌"이라며 "업무 특성상 고객이 욕설을 한다거나 성희롱적인 발언을 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딸 같은 고객에게 무시당할 때 기분아세요."
대형마트 캐셔로 일하고 있는 김지현씨는 얼마전 일만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물건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20대로 보이는 한 여성 고객이 계산이 잘못됐다며 대뜸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진열대에 붙어 있던 물건 가격보다 계산시 물건 가격이 더 높게 책정된 탓이였다. 상품을 진열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 갔다며 연신 "죄송하다"고 사죄했지만 이 고객은 오히려 더 역정을 냈다.
다른 물건으로 다시 갔다 드리겠다고도 했지만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시선이 계산대로 몰렸고, 관리 매니저가 와서 함께 사과한 뒤에야 이 고객은 발길을 돌렸다.
김 씨는 "딸 같은 고객에게 무시를 당할때는 정말이지 일을 그만 두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며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업신여김' 생활화... 웃음 뒤 심각한 정신질환
호텔업종사자 박종철씨는 '자존감'을 아예 바닥에 내려놓고 일한다.
'호텔업 종사자=벨보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으면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잦다. 나이 어린 고객의 반말은 기본이고, 물건 들어주기, 문 열어주기는 덤이다.
박 씨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분들은 오히려 존댓말을 쓰는데 오히려 나이 어린 고객들이 반말하는 일이 잦다"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시민의식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웃음 뒤에 숨겨진 감정노동자들의 속앓이는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이어진다. 서비스업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앞으로 감정노동자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안전보건공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감정노동자 2652명 중 58.3%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이중 8%는 자살을 시도하거나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한명숙 의원실이 백화점 직원, 콜센터 상담원, 승무원 등 감정노동자 2259명을 상대로 실시한 심리 조사 결과에서는 30%가 자살 충동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체 국민 평균 16%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또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3096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실태를 조사한 결과, 26.6%가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증세를 겪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730개 직업 종사자 2만5550명을 대상으로 감정동 강도를 분석한 결과, 국내 주요 직업들 중 텔레마케터(전화통신판매원)가 감정노동의 강도 가장 센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호텔관리자, 네일아티스트, 중독치료사, 주유원, 항공권발권사무원, 취업알선원 등의 순이다.
일을 하면서 불쾌하거나 화난 고객 또는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빈도가 높아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은 직업은 텔레마케터, 경찰관, 보건위생 및 환경검사원, 항공기객실승무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박상현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최근 서비스 관련 직업군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고객만족'이라는 소비문화가 만들어 낸 그늘이 감정노동"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해야만 하는 감정노동 직업인을 위한 관심과 배려, 정책적 지원이나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succu@fnnews.com 김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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