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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빛과 소금, 공복들] (82) 자본시장의 숨은 영웅 금융감독원 자본시장조사국

주식 거래의 '검은 손' 찾아 소리·소문없이 쫓는 추적자
이상 징후 매매 데이터 분석 혐의 관련자 불러 문답조사 증권 선물위 거쳐 검찰에 고발
시세조종꾼 최대 700개 계좌로 자금흐름 적발하기 까다로워
조사 알려지면 시장에 악영향.. 큰 실적 내도 자랑할 수 없어

[대한민국의 빛과 소금, 공복들] (82) 자본시장의 숨은 영웅 금융감독원 자본시장조사국
서울 여의대로 금융감독원 자본시장조사국 직원이 불공정거래 조사시스템 등을 통해 관련자료를 분석하고 있다. 사진=신아람 기자

#. 유능한 데이트레이더 강모씨는 닷컴 버블이 붕괴된 2000년 무렵 주식투자 실패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재기를 노린 강씨는 'D건설사 관련 주식투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프로젝트 팀은 상장법인 D사 주식을 미리 대량 사들인 뒤 우회상장 등 호재성 정보를 시장에 뿌리고 증권방송에서 지속적으로 투자를 권유했다. 주가가 오르자 미리 사놓은 주식을 팔았다. 팀원도 화려했다. D사 사장, 조폭, 증권사 차장, 한국계 교포 펀드매니저, 증권방송 애널리스트 실장 등 거물급 프로들이 가담했다. 이후 수백억원의 이득을 본 강씨는 꿈에 그리던 고급 외제차를 굴리며 풍족한 삶을 살게 됐다.

이 내용은 실제 사건이 아닌 영화 '작전'(2009)의 줄거리다. 강씨 사례가 실제 사건이었다면? 금융감독원 자본시장조사국에 적발돼 옥살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2015년 5월1일 OOO씨 명의 A증권사 계좌에서 *** 주식 4만주가 HTS 주문을 통해 10억원에 매수됐습니다. 이는 OOO씨 본인이 매매한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출입국기록 확인 결과 2015년 5월1일 OOO씨는 해외에 체류 중이었습니다. 당일 OOO씨 계좌의 HTS 주문은 국내 IP를 통해 이뤄졌고, 이는 ***사 임원인 XXX씨의 주문IP와 일치합니다. 이에 대해 해명해 주십시오."

"…."

얼핏 보면 검찰 조사실에서 일어나는 피의자 조사 같지만 서울 여의대로 금융감독원 5층에 위치한 문답실에서 불공정거래 혐의를 놓고 되풀이되는 문답 과정의 일부분이다. 금감원 자본시장조사국 직원은 매매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누가, 왜 이런 주문을 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건넨다. 거짓말을 늘어놓던 불공정거래 혐의자는 다음 질문에서 말문이 막히곤 한다.

[대한민국의 빛과 소금, 공복들] (82) 자본시장의 숨은 영웅 금융감독원 자본시장조사국
서울 여의대로 금융감독원 건물 5층 문답실. 이곳에서 금감원 자본시장조사국 직원과 불공정거래 혐의자 간 문답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진=신아람 기자

■누가, 왜 이런 질문을…. 끊임없는 의문과 고민

증권시장의 불공정거래 조사는 통상 '거래소-금융감독원-증권선물위원회의 심의·의결-고발 통보'의 순서로 이어진다. 금감원 자본시장조사국은 거래소 시장감시본부에서 이상징후가 있는 매매데이터를 넘겨받아 분석하고 관련자를 문답조사하는 일을 한다. 이후 증권선물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검찰에 고발 통보를 한다.

지난달 23일 파이낸셜뉴스가 찾은 금감원 자본시장조사국 사무실은 독서실과 같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조사국 직원들은 각자 자리에서 불공정거래 조사시스템과 스프레드시트(엑셀) 등을 이용해 혐의종목에 관련된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조사국의 문답조사 전 '몸풀기' 과정이다. 이상한 흐름이 발견된다면 누구로 인해, 어떤 매매주문으로 흐름이 바뀌었는지 파악하고 매매를 이끌어낸 자금을 추적한다. 보통 한달 정도 걸린다. 최광식 조사국 팀장은 "혐의자들은 그 종목에 대해 시장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 리서치 자료를 숙지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불공정거래 혐의자 간 공모 혐의를 입증하려 은행 지점 수백군데에 금융거래 조회서를 발송·수집해 불공정거래 자금흐름을 분석하고, 통정매매 등 시세조종성 주문인지를 확인하려고 수만 셀에 달하는 방대한 금융거래 자료를 분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듬성듬성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불공정거래행위 혐의자나 관련자를 문답조사 중인 직원들이다.

■혐의자와 팽팽한 심리전

사무실 같은 층에는 문답실 12개가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겉보기에는 여느 회의실과 다를 바 없어보이지만 조사국 직원과 혐의자 간 심리전이 팽팽히 벌어지는 장소다. 무게중심이 계좌에서 사람으로 이동하는 과정이자,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운 싸움이기도 하다. 스무고개와 같은 끊임없는 문답 과정은 당사자 동의 하에 녹화되고 문답서에 기록된다. 검찰의 소환조사와 흡사해 보이지만 체포·구금권한이 없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거래가 가장 많이 적발될까. 종전에는 시세조종이 전체 조사사건의 30% 내외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시세조종 보다 미공개정보를 이용한 불공정거래가 더 많이 발생하는 추세다. 정보통신기술과 결합한 신종 불공정거래도 속속 나타난다.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를 이용한 알고리즘 매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활용한 시세조종이 대표적인 예다.

적발하기 어려운 사건은 전문 시세조종꾼에 의한 범죄다. 이준호 선임검사역은 "미공개정보이용 행위는 우발적이고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시세조종 행위는 소위 전문 시세조종꾼에 의한 재범 확률이 상당히 높은 편"이라며 "전문 시세조종꾼들은 차명계좌를 써서 보다 치밀하게 접근하기 때문에 신경을 더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루보종목에 대한 다단계 주가조작 사건'의 경우 700개가 넘는 계좌가 동원되기도 했다. 시세조종꾼들은 자금출처를 감추려 종종 현금거래를 하지만, 조사원들은 폐쇄회로(CC)TV와 관련 전표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결정적인 자금의 흐름을 입증하기도 한다. 사건별로 접근 전략을 짜고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이들을 대비한 여러 질문들을 준비해두는 일도 필수다.

그렇다고 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게 목표는 아니다. 허위 진술이든 자백이든 모두 문답서에 적어내려간다. 추후 검찰 조사 등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해붕 부국장은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안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조사를 시작한다"며 "사건을 마무리 할 때는 꿈 속에서까지 '정말 잘못을 저질렀을까'를 생각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황진하 팀장은 "미공개정보 이용행위의 경우 혐의자들이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혐의를 입증할 정황증거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한다"며 "근무를 마치고 혐의자의 근무지를 떠올리며 사안들을 리마인드 해보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문답조사가 끝나면 또 다른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처리의견서를 작성하는 일로, 조사국원이 가장 바쁘고 고민을 많이 하는 시기다.

이 검사역은 "조사한 내용을 종합해 혐의 유무를 결정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강조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야근을 하거나 주말근무를 하는 경우가 잦다"고 털어놨다. 동양그룹 시세조종 사건 때는 조사국원 16~17명이 일에 매달렸다.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만큼 밤샘 작업은 계속됐고 사건은 4개월여만에 마무리됐다. 통상 금감원 조사는 3~4개월, 길게는 2년까지 걸린다고 한다.

최 팀장은 "금감원의 조사는 보통 조사국 직원 한 명과 팀장이 한 사건을 전담한다"며 "상대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조사를 시작, 불공정거래 혐의자 파악부터 혐의 입증과 고발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육체적·정신적 에너지의 소모는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조직폭력배와 같은 까다로운 혐의자를 상대한다. 실제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투자자가 관련된 모 카드사 불공정거래 사건을 담당한 금감원 조사팀장이 사건을 매듭지은 직후 뇌출혈로 순직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황 팀장은 "조사도, 혐의 판단도 팀장과 조사원 둘이서 결정해야 한다"며 "정보유출의 우려 때문에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조사 사실이 시장에 알려지면 주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조사국은 원칙적으로 신고.제보자에게도 조사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큰 실적을 내도 외부에 '자랑'할 수도 없다.

검찰수사에 협조하는 일도 잦다. 보통 고발이나 수사기관에 통보한 건에 대해 검찰에 출석해 참고인 진술조서를 작성하거나 기소에 필요한 추가 자료를 제출한다. 도이치뱅크 옵션쇼크 사건이나 동양그룹 시세조종 사건과 같은 주요 사건은 검찰과의 협업으로 조사가 마무리됐다. "업무특성상 형사사건과 맞물려 있어 증인 소환장이 집으로 날아오면 가족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고 이 검사역은 말했다. 그는 다만 "아쉬운 점은 재판 기간이 길어지면서 2~3년 전 매듭지은 일을 진술하라고 할 때가 있다"며 "당시 기억이 흐릿해지거나 담당 조사자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어 진술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불공정거래연구회 활동도 활발

수없이 걸려오는 민원 전화도 일일이 상대해야 한다. 1년에 1400여건, 하루에 5건 가량 증권 불공정거래 혐의에 대한 신고.제보를 접수하지만, 투자했다가 피해 본 사람들이 "작전세력 때문에 돈을 잃었다"며 오는 호소성 제보도 많다.

이 때문에 금감원 내에서 조사국은 직원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불공정거래 조사에 대한 사명감과 조사분야 전문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0여년간 꾸준히 근무하는 직원도 점차 늘고 있다.
조사원의 역량을 평상시 갈고 닦기 위한 금감원 내 불공정거래연구회 활동도 활발하다.

30년 역사를 갖춘 '불공정거래 조사분야 최고 전문가'라는 사실은 이들에게 가장 큰 자부심이다. 자본시장조사1국 김현열 국장은 "자본시장은 기업에게는 자금조달, 투자자에게는 부를 축적하는 장을 마련하고 자본시장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작동돼야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며 "이런 업무를 최일선에서 하는 금감원 조사국 조사원들은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hiaram@fnnews.com 신아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