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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또 겹치기 주총, 주주권 강화는 말뿐

3월.금요일에 집중 개최
소통 기회 스스로 저버려

올해도 겹치기 주주총회가 되풀이됐다. 적게는 수십개, 많게는 수백개 상장사가 한날한시에 주총을 여는 오랜 관행이다. 50여개사 주총이 열린 11일은 삼성데이, 현대차데이라 할 만하다. 이날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생명.물산 등 삼성 계열사들이 일제히 주총을 치렀다. 현대자동차그룹도 현대차를 비롯해 현대모비스.글로비스 등이 주총을 열었다. 이날은 약과다. 다음주 금요일(18일)엔 225개사, 그 다음주 금요일(25일)엔 367개사 주총이 대기 중이다. 18일은 SK.LG데이, 25일은 한화데이다.

주총일이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국내 상장사 대부분은 12월 결산법인이다. 법규상 12월 결산법인은 3개월 안에 외부 회계감사를 거쳐 정기주총을 열도록 돼 있다. 상장사 결산일이 3.6.9월로 적당히 분산되지 않는 한 3월에 주총이 몰리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3월 중에서도 특정 요일에 주총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현상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왜 꼭 금요일, 그중에서도 마지막주 금요일인가. 월.화.수.목요일엔 주총을 열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는 우리나라 상장사들이 주총을 소통의 장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요식행위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주들 또는 언론의 이목을 끌기가 싫다는 얘기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정기.임시주총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33분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주총장은 안건 통과를 알리는 의사봉 소리만 요란하다는 비아냥이 나올 만하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는 주총의 모범사례다. 해마다 5월 첫째주엔 주주 수만명이 본사가 있는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모인다. 버핏은 주주 한 명에게 초청장 넉 장을 보낸다. 주주들은 가족과 함께 와서 휴가처럼 주총을 즐긴다. 그래서 버핏이 주최하는 주총은 자본가의 우드스탁이라 부른다. 마치 팝 페스티벌 우드스탁처럼 자본주의의 꽃이라 할 주총 축제를 주주들이 마음껏 즐긴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우리 기업들이 당장 버핏식 주총을 흉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주와 소통하려는 기본정신만은 지금이라도 본받아야 한다. 그래야 회사와 주주 간에 신뢰가 쌓인다. 주총을 속성으로 해치우는 낡은 관행은 한국 자본주의의 후진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기업들은 틈만 나면 주주권 강화를 외친다.
하지만 동시다발 주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진심으로 주주를 소중히 여기는 기업이라면 겹치기 주총 습관부터 바꿔야 한다. 정 안 되면 금융당국이 끼어들어 주총일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