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결혼 후 자유롭게 살고 싶어"
"부부도 남도 아닌 이기주의 극단"
서로 원수져 갈라서는 이혼이나 별거와 달리
'가족' 고리 유지한채 각자의 삶에 더 집중'
미혼57% "나쁘지 않다"
수십년 세월 동고동락, 부부의 의미 더 깊어져
서로의 삶 공유 못하면 결혼 유지할 이유 없어.. 헤어져야지, 웬 졸혼?
#.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40대 워킹맘 A씨는 최근 직장에서 들은 '졸혼(卒婚)'에 대한 얘기를 남편에게 꺼냈다 한판 싸움을 벌였다. A씨는 "결혼생활 13년 동안 아이 둘을 키우면서 교육관이나 생활스타일이 (남편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며 "애들을 생각하면 이혼은 아니지만, 100세 인생이라고 할 때 앞으로 길게는 60년이나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갑갑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의 남편은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결혼을 졸업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로 막 살자는 거냐"며 격노했다고 A씨는 전했다.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쓴 '졸혼을 권함'(2004년)이라는 책에서 처음 소개된 '졸혼'은 말 그대로 '결혼을 졸업한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일본에서는 중년부부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혼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혼은 아니나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의 생활에 깊숙이 개입하는 평범한 결혼에서는 한참 벗어난다. 자녀가 장성한 뒤 부부가 따로 살며 각자의 삶을 즐기고,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만난다는 점에서 별거와도 그 개념이 다르다.
즉, 가장 1차원적 가족이라는 관계망과 생활의 고리는 걸어놓은 채 '따로' '각자의 삶을' '향유' 한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어찌 보면 마하트마 간디가 서른일곱 살에 제안했다는 '해혼(解婚)'과 유사하다. 오랜 시간 깊어진 불화로 부부가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결혼 역시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완료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의 해혼은 인도에서는 낯설지 않은 문화라고 한다.
파이낸셜뉴스는 이번 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의 주제를 '백년해로는 옛말, 결혼도 졸업한다'로 정하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졸혼'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어봤다.
■"노후에는 나만 위해 살고 싶다"
졸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이른바 '백세시대'로 불릴 만큼 기대수명이 길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20~30년 정도였던 결혼생활이 길게는 70년까지 늘어난다면 이에 대한 부담감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긴 시간을 공유해도 결국 서로 다른 객체일 수밖에 없는 성인 두 사람이 인생의 마지막까지 '지지고 볶으며' 사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할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인 가연이 모바일 결혼정보서비스 '천만모여' 회원 54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졸혼'에 대한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57%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남성(54%)보다 여성(63%)이 졸혼에 더 긍정적이었지만 남성도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
이들이 졸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로는 '결혼생활 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노후에라도 하고 싶어서'가 57%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배우자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22%), '사랑이 식은 상태로 결혼생활을 유지할 것 같아서'(18%) 등을 꼽았다.
50대 회사원 이모씨는 '자녀들을 결혼시킨 후에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30년간의 결혼생활로 쌓인 부부의 정을 생각하면 이혼이나 별거까지는 아니지만, 더 이상 부인의 '오더'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씨는 "낚시와 등산이 취미인데, 그동안은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1년에 많아야 서너 번 정도 갈 수 있었다.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인 만큼 주말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며 쉬고 싶은데, 아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퇴직 후에나, 애들이 다 큰 뒤에는 오로지 나를 위해 살고 싶다"고 털어놨다.
■"부부도, 남도 아닌 이상한 관계"
반면 '졸혼'에 대한 반론도 컸다. '이기주의의 극단' '부부도 뭣도 아닌 이상한 관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기 평택의 30대 주부 조모씨는 "졸혼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는데, 이상한 말 같다"며 "부부도, 남도 아닌 이해에 따른 관계 유지 아니냐"고 꼬집었다.
부산 해운대구에 거주하는 최모씨(32)는 "황혼이혼이니 졸혼이니 이런 말들을 들으면 결혼에 대한 환상은 고사하고 '왜 해야 하나' 회의감만 든다"며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지 못할 정도라면 헤어져야지 '졸혼'이라는 이름까지 붙이면서 왜 결혼을 유지하나"라고 되물었다. 그는 "퇴직 후 따로 생활한다면 재산도 완전히 분리하는 건가. 만약에 어느 한쪽이 아파서 혼자 생활이 안 된다면 어찌 하나. 요양원에 자기 발로 들어가라는 거냐"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교사인 백모씨는 "'졸혼'이라는 말은 결혼생활을 부담과 의무라는 측면으로만 부각시키는 것 같다"며 "가족이나 부부가 가지는 의미는 더 크고 깊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 그렇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로(偕老)'라는 말에 담긴 의미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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