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IB 부총재 몫 빼앗겨, 대응 미숙한 정부 헛발질
한국 몫이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 자리가 말 그대로 날아갔다. 4조원 넘는 분담금을 내고 어렵게 따낸 자리다. 이런 자리가 말도 안 되는 내부 분란 끝에 5개월 만에 다른 나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AIIB는 장기 휴직계를 낸 홍기택 부총재 후임으로 프랑스 출신 인사를 이미 내정했다. 부총재급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도 신설했다. 8일자로 홈페이지에 CFO 공개모집 공고를 냈지만 요식 행위일 뿐이다.
나아가 AIIB는 홍 부총재가 맡던 투자위험책임자(CRO) 자리를 국장(Director General)급으로 격하시켜 역시 공고를 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진리췬 AIIB 총재는 행여 한국이 CRO 자리는 한국 몫이라고 주장할까봐 수를 쓴 것 같다. 그 자리를 꼭 맡고 싶다면 주겠지만 국장급이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듯하다.
중국의 꼼수가 못마땅하지만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 지난달 초 홍 부총재는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청와대 서별관회의를 비판했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KDB산업은행은 들러리였을 뿐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자금지원은 정부와 청와대가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검찰은 산은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감사원은 대우조선에 대한 산은의 관리.감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홍 부총재는 지난달 25일 AIIB 창립총회도 빼먹은 채 잠적했다.
AIIB는 경제패권을 꿈꾸는 중국의 야심작이다. 우리도 그 배에 올라타기 위해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담금 5위 출자국으로 참여했다. 그 덕에 모두 5명인 부총재 중 한 자리도 차지했다. 하지만 홍 부총재는 그런 자리를 제멋대로 걷어찼다. 나머지 4개국(영국.독일.인도.인도네시아) 부총재들이 멀쩡히 임무를 수행 중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판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 결정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 내 여론마저 심상찮다.
홍 부총재가 잠적한 뒤 우리 정부가 보인 미숙한 대응도 이해할 수 없다. 유일호 부총리는 지난달 29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후임자를 새로 뽑을 경우 한국에서 맡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다른 나라 사람으로 내정이 끝난 줄도 몰랐단 말인가. 국가브랜드만 열심히 만들면 뭣하나. 이런 일이 터지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격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홍기택 퇴진으로 유야무야 끝낼 일이 아니다. 국제 망신을 자초한 자초지종을 밝히고 관련자들에 대한 책임도 엄히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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