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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관료의 복지부동, 땜질정책 양산한다

"누진제 개편 없다"던 정부.. 대통령 한마디에 요금 인하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도 "누진제 개편은 없다"고 완강히 버티던 정부가 불과 반나절 만에 입장을 바꿔 전기료 인하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11일 낮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누진제에 대한 좋은 방안을 발표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산업통상자원부가 이날 저녁 발표한 '주택용 누진제 요금 경감 방안'은 7~9월에 한해 전기요금을 '찔끔' 내려주는 것일 뿐 누진제 개편은 외면하고 있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가정용 전기료 파문은 관료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기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든 말든 정부 관료들은 꿈쩍하지 않았고 엉뚱한 발언으로 국민의 심사를 뒤집어 놓았다. 채희봉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은 "스탠드형 에어컨 기준으로 하루 4시간 사용하면 냉방요금이 10만원을 안 넘으니 버틸 만하다" "누진제 개편은 1%를 위한 부자감세와 같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던 산업부가 대통령의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논리를 뒤집고 반대되는 정책을 즉흥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관료들에게서는 땜질 정책만 나올 수밖에 없다.

박근혜정부의 관료들이 대통령 말을 따라 정책을 뒤집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2013년 8월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게 깃털을 살짝 뽑는 것"(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며 봉급생활자 세부담을 높인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가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원점에서 재검토해달라"고 지시했고, 정부는 면세자 비율을 높여야 했다. 지난해 초 연말정산 때 '13월의 세금폭탄'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파문이 커지자 정부는 또다시 보완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대기업집단 기준 상향(자산총액 5조원→10조원)도 마찬가지다. 재계의 건의를 묵살하던 공정거래위원회는 박 대통령이 지난 4월 "대기업지정 제도는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하자 부랴부랴 기준을 바꿨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구공항 이전을 조속히 추진해달라"고 주문하자 이전 건의서를 접수한 이후 2년 동안 꿈쩍 않던 국방부가 곧바로 이전 용역발주를 발표했다.

정부가 정책의 결정 주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게 마련이다. 또한 주요 정책이 목소리 큰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청와대와 국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다. 포퓰리즘적인 결정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정책보다는 땜질.누더기 정책이 나오게 될 것이다.


관료들이 민생 현장을 도외시하고 대통령과 청와대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면 전기료 파문 같은 정책 난맥상이 앞으로도 빈번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정부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공직사회의 각성과 개혁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