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이 던진 미끼를 트럼프가 덥석 물었다." "클린턴이 놓은 덫에 트럼프가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권투선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복싱 경기 이후 최대 결전이 될 것으로 기대됐던 1차 미국 대선후보 TV토론이 9월 26일(현지시간) 끝났다.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연일 '남 탓 공세'를 펼치며 자신의 패배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토론 다음 날인 27일 토론 사회자인 레스터 홀트 NBC 앵커가 자신에게만 적대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주장했고, 토론 중 자주 코를 훌쩍인 것에 대해선 "불량 마이크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28일에는 유세 도중 "구글이 힐러리에 대한 나쁜 뉴스를 거르고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미디어의 '달인'이다. 미국 전국 1위 시청률을 기록한 '어프렌티스'를 시즌 14까지 진행했던 리얼리티쇼 스타다. 2004년부터 10여년간 방영된 '어프렌티스'는 참가자 16~18명이 트럼프 계열사 중 한 곳을 연봉 25만달러로 1년 운영하는 계약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하는 서바이벌 리얼리티쇼다. 여기에서 트럼프는 직설화법으로 자기 할 말 다하는 결단력 있는 리더로 비쳤다. 거짓말쟁이와 불성실한 사람을 경멸하고, 자기 비하를 일삼거나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을 혐오했다.
트럼프가 매번 참가자 중 한 명을 탈락시키며 외친 "당신은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말은 한때 유행어가 됐다. 시즌 10에서 한 참가자가 그룹 프로젝트에서 부정행위를 하자 "이것이 미국이 지금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5년간 월가에서 목격해온 사고방식과 비슷한 것이다. 당신은 해고야"라고 말한 트럼프에게 시청자는 환호했다.
트럼프는 이런 이미지를 발판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말만 하고 행동은 없는, 거짓말만 늘어놓는 기성 정치인과 차별된, 진정한 변화를 이끌 지도자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이번 대선후보 TV토론을 앞두고 미국 언론들은 클린턴과 트럼프가 세기의 대결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 토론과 국정운영 경험이 많지만 따분한 클린턴보다 거침없는 '흥행꾼' 트럼프가 유리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트럼프의 판정패였다. 리얼리티쇼 스타처럼 임기응변과 순발력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쇼맨십이 오히려 트럼프의 발등을 찍었다. 트럼프는 토론 리허설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클린턴이 미끼를 던질 때마다 물었고, 클린턴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어들어갔다.
클린턴은 토론 전 트럼프와 인사를 나눌 때부터 기선 제압에 들어갔다. 트럼프와 악수하며 '미스터(Mr.) 트럼프'라는 경칭 대신 '도널드'라고 이름을 불렀다. 반면 트럼프는 클린턴에게 '클린턴 장관'이라고 불러도 될지 물어봤다. '힐러리'라고 이름을 부른 건 몇 차례에 불과했다. 클린턴이 "트럼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1400만달러로 사업을 시작했다"며 자수성가한 사업자가 아니라고 비판하자 트럼프는 "아버지는 내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았다"며 공세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클린턴의 공격에 "똑똑해서"라고 답해 공분을 일으켰다.
토론 막바지에 트럼프가 클린턴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외모나 스태미나가 없어 보인다"고 공격했다가 "여성을 개나 돼지로 불렀던 사람이 화제를 스태미나로 돌린다"는 클린턴의 반격으로 허를 찔렸다.
트럼프 캠프와 공화당 측은 이번 토론으로 트럼프가 교훈을 얻었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공화당 인사들의 반대에도 다음 대선토론에서 빌 클린턴의 불륜 문제를 거론, 클린턴을 거세게 다룰 것임을 예고했다. 두 차례의 대선토론이 남아 있다. 트럼프의 전략이 이번에는 통할지 궁금하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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