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흥행한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의 마지막 장면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간첩으로 몰려 처벌된 이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거나 국가배상을 끌어낸 사건 목록으로 꾸려진다. 스크린 위로 흘러가는 사건명은 모두 96개로, 이들 모두는 국가가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해 처벌한 사건이다. 그리고 지난달 15일부로 이 목록은 97개가 됐다.
2016년 12월 15일 서울고법 서관 302호에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김명수(68), 나도현(69), 전병생씨(66)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 하인 1975년 10월 어느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이끌려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로 끌려간 지 41년 만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정황이 확인되고 이에 따른 허위자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교역자를 꿈꾸며 한국신학대(현 한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들은 중정에 불법 체포돼 한 달여에 걸쳐 모진 고문과 협박, 회유를 받은 끝에 자신들이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북한에 포섭된 재일동포 유학생 김철현의 지령을 받아 유신철폐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등의 혐의였다.
소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중정이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을 억압하기 위해 재일동포 유학생을 간첩으로 몰고 한국 내 학생들을 연루시킨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이다. 중정은 분단 전 일본에 뿌리내린 재일동포 사이에서 친북한적 성향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노려 이 같은 조작을 벌였고, 재일동포 유학생 12명과 한국 내 대학생 9명을 간첩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기소돼 법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김씨를 포함한 3명에게도 1심에서 무기징역이, 항소심에서 각 수년씩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출소 뒤에도 국가보안법과 보호관찰법에 따라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감시당하는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조작 논란이 일었던 이 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4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2010년 조작으로 결론 났다. 중정이 영장도 없이 피해자들을 불법 연행해 전기고문과 물고문, 구타 등 가혹행위를 자행한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간첩조작이라는 결과가 나온 직후 피해자들은 각각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씨 등 3명도 앞서 무죄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피해자들의 권유로 2010년 재심을 신청했다.
중정 후신인 국가정보원은 홍보관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2015년까지 이 사건을 치적으로 기록해 알린 바 있다.
판결 직후 피해자 중 1명인 김씨는 "1975년 10월 19일 새벽 아무 영문도 모른 채 4명의 정체불명 요원들에게 남산으로 끌려갔다. 지하 고문실에서 한 달여 동안 취조받은 기간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의 순간이었다"며 "유신정권 시대에 있었던 그 때의 모든 잔재들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계속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는가"라고 작금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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