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대홍수 피해지역인 타딘댕 마을 집앞에 선 코리안리재보험 안지원 생명보험팀 사원(왼쪽 두번째).
지난 2월 12일 신입사원 동기들과 함께 태국 아유타야로 향했다. 해외봉사활동은 신입사원 연수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코리안리는 지난 4년간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해외 자연재해현장으로 보내왔다. 작년까지는 필리핀 '하이옌'태풍 피해지역에 갔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돕던 마을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올해엔 태국 대홍수 피해지역으로 가게됐다.
선배들에게 들어보니 2011년에 불어닥친 태국 대홍수는 재보험사들에 뼈아픈 경험을 안겨준 자연재해였다. 3개월 동안 계속된 대홍수로 태국 중북부가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고, 전 세계 재보험사들이 이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다.
우리가 찾은 타딘댕 마을은 짜오프라야강 지류에 있어 침수가 잦은 곳이었다. 강 인근에 위치한 총 4개 가정의 집짓기 활동을 집중적으로 돕기로 했다. 작업에 앞서 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보았는데, 지은 지 수십년이 지난 나무집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지붕이고 벽면이고 할 것 없이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비라도 오면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우리 코리안리 봉사단이 맡은 작업은 정화조 설치를 위한 구덩이 파기, 집터에 바르기 위한 콘크리트 믹싱 작업, 벽돌로 집 내외벽 쌓기 등이었다. 집짓기 작업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자면 중기에 해당하는 작업이었다.
구덩이 파기는 평지에서 무려 1.8m 깊이로 파내려가야 하는 작업이라 체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시멘트와 모래, 자갈을 섞는 콘크리트 믹싱 작업도 만만치는 않아서 취업준비로 인해 육체활동을 할 기회가 많이 없었던 동기들 모두 첫날에는 근육통에 시달렸다.
작업에는 태국인 홈파트너도 함께했다. 해비타트에서는 새로운 집에 살게 될 수혜자들을 '홈파트너'라고 불렀다. 홈파트너도 의무적으로 자신이 살 집을 짓는데 일정시간 이상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순한 인상의 홈파트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우리는 태국어를, 그는 영어를 못했다. 태국어로 연습해간 몇 마디 인사말도 통하지 않았다. 5개의 성조를 가진 태국말을 발음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각자의 모국어와 보디랭귀지로 소통하는데도 나중에는 눈빛만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친해졌다.
현지에서 만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홈파트너 가정의 아이였던 열두살 '넷'과 다섯살 '보'를 비롯해서 여러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다가왔다. 중간중간 휴식시간 동안 아이들과 보디랭귀지로 나눈 대화는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스스로 말하기 민망하긴 하지만 우리 봉사단은 몸을 사리지 않고 꽤 열심히 일했다. 그냥 작업 자체가 즐거워서 힘든 줄 몰랐고 힘든 와중에 동기애가 솟았다. 작업에 익숙해지면서 일에 속도가 붙었다. 원래 해비타트 측에서 설정한 목표는 창문 높이까지 벽돌을 쌓는 것인데, 결국 지붕 높이까지 벽돌을 쌓고 돌아왔다.
해비타트 봉사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우리 작업의 결과물을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5박6일 동안 우리가 쌓아올린 벽돌로 어엿한 집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을 보고 스스로 대견해하기도 했다.
태국을 떠나는 날, 결국 눈물이 났다. 내가 울기 시작하니까 전염된 듯이 같이 울기 시작했고, 나중엔 현지 주민분들과 부둥켜안고 울고 말았다. 그 눈물의 의미가 뭐였을지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았다. 5일 동안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도왔다는 뿌듯함이었고, 어느새 깊어진 동기들과의 애틋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감정은 나에게 특별해진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었다.
동기들 몇몇과 나중에 같은 마을로 봉사활동하러 다시 오기로 약속했다.
그때 즈음이면 완성된 집에서 살고 있는 넷과 보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사회인이 되는 길목에 선 나는 어쩌면 곧 바쁜 일상과 분주한 업무에 쫓겨 태국에서의 기억을 서서히 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해비타트의 감동을 잊기 전에, 그 다짐을 이렇게 기록해놓고자 한다.
코리안리재보험 안지원 생명보험팀 사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