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여행사의 패키지여행(기획여행) 일정 중 자유시간에 현지 업체를 통해 바나나보트를 타다 사고로 사망했다면 여행사 측에도 법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A여행사는 숨진 고객의 유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사고를 당한 고객이 보트 탑승 전 위험인수 동의서에 서명한 점 등을 근거로 면책을 주장했으나 법원은 현지업체가 무면허 운전자를 고용하는 등 비정상적 사고에 대해서까지 면책약정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보트전복 사고로 아들 숨지자 여행사 상대 소송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김모씨는 지난해 1월 7일부터 11일까지 5일간 A여행사가 기획한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빈탄섬 여행을 떠났다.
여행 3일차되는 날은 조식 후 전일 자유시간으로 계획됐는데 김씨 부부는 골프 라운딩을, 10대인 딸과 아들은 바나나보트에 탑승키로 했다. 현지가이드 A씨의 안내에 따라 남매는 해양스포츠업체 직원에게서 대략의 안전교육을 받고 구명조끼를 착용했으나 바나나보트가 전복되면서 김씨 아들이 운전자 없이 빙글빙글 돌던 보트에 머리를 가격당해 사망했다. 조사 결과 김씨 가족이 머물던 인도네이사 R리조트는 무면허자를 바나나 보트 운전자로 고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김씨는 "여행계약 약관에 따라 현지 여행업자인 R리조트의 귀책사유에 의한 사고를 책임지라"며 지난해 8월 A여행사를 상대로 7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A여행사가 공정거래위원회 제시 해외여행표준약관에 따라 작성한 약관에는 '여행사는 여행사나 그 고용인, 현지여행업자나 그 고용인이 여행자에게 고의나 과실로 손해를 가한 경우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A여행사는 "사고는 자유일정인 날로, 바나나보트 탑승은 여행계약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고 R리조트는 현지여행업자가 아니라 숙박업자에 불과해 약관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맞섰다. 또 "김씨 자녀들이 보트 탑승 전 위험인수 동의서에 서명, 위험을 스스로 인수한 만큼 사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권혁중 부장판사)는 "A여행사는 김씨 자녀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자유여행 배상기준 마련해야"
재판부는 "당시 조종면허를 갖고 있지 않았던 보트 운전자의 부주의로 사고가 발생한 점을 종합하면 피고(A여행사)로서는 적어도 R리조트가 해양스포츠 시설을 운영하면서 관련법을 준수했는지 여부를 먼저 조사한 뒤 여행일정표에 해양스포츠 안내를 하거나 상품 홍보영상에 포함시켜야 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김씨 자녀들이 보트 탑승 전 위험인수 동의서에 서명한 만큼 사고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위험인수 동의서 존재만으론 여행자가 모든 사고의 위험을 인수했다고 해석할 수 없고 해양스포츠 시설이 법을 준수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도 위험을 인수하겠다는 취지로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다만 "A여행사가 여행 일정표에 자유일정을 보낼 때 개인 안전에 특히 유의해 달라고 부탁했고 김씨 아들이 사고 당시 만19세의 성인으로, 자유일정의 의미에 대해 알았던데다 위험인수동의서를 작성하면서 보트탑승 위험성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며 A여행사의 배상책임을 20%로 제한, 김씨 측에 1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양측이 판결에 불복, 항소하면서 이 사건은 서울고법 민사36부에 배당돼 심리를 앞두고 있다.
한편 전문가들은 패키지여행 자유시간에 발생한 사고와 관련해 공정위가 기준약관으로 제시한 국외여행표준약관에 구체적인 책임과 배상기준이 없어 소비자들이 불필요하게 법적다툼으로 내몰리는만큼 약관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비자시민모임 백대용 부회장(변호사)은 "소비자는 여행사가 안내해 준 자유일정의 안전성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며 "여행사가 자유일정을 통해 일정한 커미션을 얻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자유일정 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태도는 이익만 얻고 책임은 회피하겠다는 매우 이기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여행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소비자 피해를 사전적으로 예방하기 위해 공정위 표준약관이 신속하게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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