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 '맑은 마음 착한 행실 고운몸매'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
일부 여중, 여고에서 사용하는 교훈(校訓)이다. 이처럼 상당수 여자학교에서 성적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교훈이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못한채 버젓이 사용돼 과거 여성의 지위, 결혼에 대한 인식을 관행적으로 답습한다는 게 학생들의 불만이다.
28일 일선 학교에 따르면 A여중 3학년 박모양(16)은 학교 복도를 지날 때면 마음이 답답하다. 학교 1층 로비에는 교훈 '슬기롭고 알뜰한 참여성' 문구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날 조례시간에 '참여성 되자'는 교가를 부를 때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심정이다. 이 학생은 "교훈을 보면 여자는 커서 현모양처가 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며 "학생은 꿈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 꿈은 참여성으로 정해져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수업시간에 몇몇 친구들과 교훈을 문제 삼았지만 대부분 관심이 없었다"고 전했다.
성차별적 여중·여고 교훈은 대체적으로 미(美), 순결, 모성, 여성이 되자다. B여중 '아름다운 맵시' C여고·D여고 교훈에는 ‘순결’이라는 문구가 들어간다. E여고는 '착한 딸 어진 어머니'가, F여중은 '부덕을 높이자'는 교훈이 있다. 부덕(婦德)은 부녀자가 지켜야 하는 덕목을 뜻한다. 이밖에 '여성이 되자'는 교훈을 사용하는 학교도 다수다.
여고졸업 후 출판사에 재직 중인 최모씨는 "(돌이켜보면) 여성 청소년들은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성차별 요소에 저항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접할 기회가 없다"며 "성차별적 교훈을 통해 성차별적 메시지에 익숙해지면 남성 입장에서 가치관을 형성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아름다운 여성이 뭐가 문제?...성고정관념 우려
'여성보고 여성이 되자는 게 뭐가 문제냐' '아름다움, 순결이 나쁜거냐'고 반문하는 입장도 있지만 전문가 의견은 다르다. 가치는 성별이 없는데도 학교에서 특정 가치를 성별화하는 것은 정체성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 순결, 남성 용기'라는 식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가치를 여성에 한정할 경우 성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중고와 반대로 남중·남고 교훈 중 '순결'이나 '아름다움' '남성이 되자'는 없다.
이상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실장은 "여중·여고 교훈이 특정 가치로 한정되면 '남자는 순결하지 않아도 괜찮아' 같은 이중적 성문화가 될 수 있다"며 "여자, 남자가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소통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학습된 가치 성별화는 결국 소통 이분화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같은 말을 하면서도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여혐·남혐'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차별적 교훈 제고..."독자성 고려"
대구 G여고 교훈은 "겨레의 밭-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 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가꾸어 지나니 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다. 이 학교 졸업생 박모씨(23)는 "여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모성애를 강요하고 육아를 전가하겠다는 뉘앙스여서 불쾌했다"며 "나 자신이 아닌, 어머니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인 역량계발을 강조하는 류의 교훈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페미니즘 뿐 아니라 인적자원개발관점에서 교훈은 현명한 부인보다 여성 독자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신사임당은 율곡 어머니가 아니다. 신사임당 스스로가 화가고 학자"라고 밝혔다.
관행적으로 만들어진 교훈을 학생들 스스로 결정하는 게 입법훈련과 준법훈련 연습에 긍정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입법훈련 연장선상에서 교훈도 학내구성원인 교사·학생이 모여 회의하고 토론을 거쳐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교훈은 학교 개설시 교장, 교사, 학생을 비롯해 구성원이 만든다"며 "법률 행정 지침은 따로 없지만 시대변화에 따라 교훈의 의미가 퇴색되면 학교구성원 뜻에 따라 중간에 바꿀 수도 있다"고 전했다.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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