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험자가 자살한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약관이 있더라도 보험사가 명백한 자살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설민수 부장판사)는 A씨의 유족들이 B보험사를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보험사는 유족들에게 보험금 4억4000만원을 전액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고 6일 밝혔다.
지난해 6월3일 새벽 서울시 서초구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술에 취한 A씨가 건물 6층 외부에 있는 비상계단에서 떨어져 숨졌다. 사망 당시 A씨의 혈중알콜농도는 0.125%로 만취상태였다.
A씨는 2010년 1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B보험사의 상해사망보험 4개를 가입했다. 이에 유족들은 B보험사에 "A씨의 사망에 따른 보험금 4억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B보험사는 A씨가 우연한 사고가 아닌 자살에 의해 사망했다며 보험계약에서 정한 보험사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보험 약관 상 자살에 의한 사망사고는 면책사유에 해당한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사고가 일어난 계단의 철제 난간에는 동그란 모양으로 묶인 노끈이 발견됐다. 보험사는 이 노끈에 A씨의 DNA가 검출된 것을 근거로 자살로 판단했다.
이에 A씨의 유족들은 B보험사를 상대로 "일반상해사망 보험금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보험금 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는 면책사유에 해당하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며 "자살 의사를 밝힌 유서 등 객관적인 물증의 존재나 일반인의 상식에서 자살이 아닐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명백한 정황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며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A씨의 목에서 난간에 묶여 있던 노끈의 섬유성분이 검출되지 않았고, 노끈이 자살할 용도로 묶인 것이라고도 단정하기 어렵다"며 "또 취한 상태의 A씨가 난간에 기대었다가 실수로 몸의 균형을 잃어 추락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는 사고 전날 딸과 통화하면서 가족여행을 가자고 말했는데, 이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A씨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다거나 가족 간의 불화, 경제적 곤궁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워 자살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fnljs@fnnews.com 이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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