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원래 도구를 환자 가슴 위에 올려놓나?'
가슴팍에 진료도구를 늘어놓고 충치를 치료하는 남자 의사가 자꾸 신경쓰였다. '빨리 치료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 태연한 척하며 치과를 나섰지만 가슴을 건드렸던 사실이 계속 생각났다.
지난달 서울 영등포의 한 치과에서 치료받은 A씨(32.여)는 "의사가 성추행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불쾌했다"고 털어놨다.
미투(#Me-Too, 나도 당했다)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나 진료 과정 중 성적 수치심을 느낀 환자들은 속으로만 앓고 있다. 진료에 필요한 행위라면 성추행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환자들은 트라우마를 갖기 쉬워 의료계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환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자는 수치심에 화끈, 대법은 '무죄'
22일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해 1월 변비증상으로 내원한 여중생 속옷에 손을 넣어 진찰한 혐의를 받는 소아과의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진료에 필요한 행위였다면 이로 인해 환자가 다소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꼈더라도 추행으로 볼 수 없다"는 원심 판단을 수긍했다. 신체 접촉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의료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4월 골반통증을 호소하는 여대생을 상대로 진료 중 은밀한 부위를 만진 혐의로 기소된 한의사(50)에게 징역 10월과 40시간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치료를 빙자해 위계로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추행행위를 했다"고 판시했다.
최재웅 변호사(법무법인 성현)는 "진료행위라 해도 환자가 수치심을 느낀 순간부터 성추행을 의심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설명했다.
성추행이 아니더라도 성적 수치심은 그대로 가슴에 남는다. 김모씨(27.여)는 2015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코뼈 골절 수술을 받았다. 당시 코 부분마취 상태에서 수술이 끝나자 한 남자 실습생이 집도의, 간호사 등이 보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김씨 상의를 벗겨 맨 가슴에 부착된 전극을 떼냈던 것이다. 김씨는 "너무 놀랐고 수치스러웠지만 화를 내면 과민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아무 말도 못했다"며 "개복수술도 아니고 단순 코뼈 절골수술이었는데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상체를 드러낸 것이 자꾸 생각나 괴롭다"고 말했다.
■환자 배려 규정 無, 의협 "관련 교육할 것"
'진료행위에 신체접촉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서울 동작구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김모씨(36)는 "진료에 매진하다 보면 환자 심리 등을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할 때가 있지만 의도를 갖고 성추행하는 의사는 극히 일부"라고 밝혔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민감한 부위를 진료하기 전 환자에게 꼼꼼히 설명하는 외국과 달리 우리는 의사와 환자간 소통이 부족해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료과정 중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자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2015년 '샤프롱(chaperone)제도(민감한 부위를 진찰할 때 보호자, 간호사 등이 동석하는 제도)' 법제화를 주장했으나 유야무야됐다. 의료윤리연구위원회 이명진 전 회장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결국 진료행위와 성추행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료계 자체의 환자배려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김미순 상임대표는 "환자들도 성추행인지 아닌지 애매하고 불쾌해도 대놓고 말하기 어려워 한다"며 "의사가 미리 진단부위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성추행 기준이 주관적이어서 일률적으로 규정하기가 어려워 의사가 스스로 윤리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며 "제3자, 혹은 보호자를 의무적으로 동석시키거나 사전 설명의무 준수 등을 내용으로 교육하기 위해 내부논의 중"이라고 설명했다.
kua@fnnews.com 김유아 이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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