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재상 윈스턴 처칠은 팔방미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큰 정치인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썼다. 평생 우울증을 앓은 그에게 그림은 좋은 친구가 됐다. 처칠은 '찰스 모린'이란 예명으로 작품 수백점을 남겼다.
글재주도 남달랐다. 처칠은 신문과 잡지에 수시로 기고했다. 1936년부터 이브닝 스탠더드지에 격주로 칼럼을 실은 것은 유명하다. 처칠은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유화정책의 위험성을 누누이 경고했다. 일생을 통틀어 처칠은 소설 1권, 자서전 2권, 회고록 3권과 여러 권의 역사책을 썼다. 역사책 가운데는 '영어 사용 민족의 역사(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가 도드라진다. 4권짜리 책인데, 로마제국 케사르가 영국을 침공한 서기전 5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까지 긴 역사를 다뤘다. 어지간한 역사학자 뺨을 치고도 남는다.
뭐니 뭐니 해도 문필가로서 처칠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6권짜리 대작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다. 처칠은 1차 대전이 끝난 때부터 2차 대전 종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을 회고록에 담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처칠을 뽑았다. 정치인에게 준 노벨문학상은 훗날 가수에게 준 문학상(밥 딜런.2016년)만큼이나 놀랍다.
미국 정치인들도 자주 책을 쓴다. 선거를 앞두고 쓰기도 하고, 퇴직한 뒤에 쓰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2007년에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됐다. 백악관 8년 스토리를 담을 회고록은 출판사와 계약만 맺었을 뿐 아직 나오기 전이다. 판권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우리 정치인들도 책을 많이 낸다. 하지만 질은 장담 못한다. 전직 대통령 회고록은 제 주장만 앞세우는 탓에 교훈은커녕 공연한 분란만 일으키기 일쑤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역시장.도지사.시장.군수를 노리는 이들도 앞다퉈 책을 냈다.
여기저기서 출판기념회를 여느라 한동안 떠들썩했다. 어떤 기업은 특정 후보가 낸 책을 집중적으로 사주기도 한다. 책이 안 팔려 울상인 출판계엔 고마운 일이지만 뒷맛이 영 개운찮다. 정치인 책이 오로지 제 실력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날을 볼 수 있을까.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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