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름 국군포로]<上> 마지막 국군포로 '29명조' 故 손동식씨
정전협정 맺어지기 두달전 인민군에 포로로 붙잡혀
북한서 가정 이뤄 살았지만 국군포로 주홍글씨로 남아
"통일 되면 고향에 묻어줘" 탈북한 딸이 전한 유언
손명화씨(오른쪽)가 탈북 3개월 전 어머니 고(故) 전수복씨와 평양직할시를 방문했을 당시 찍은 사진.
고(故) 손동식씨
43호. 6·25 전쟁 당시 북한으로 잡혀간 국군포로를 지칭하는 단어다. '남조선 괴뢰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던 43호들은 평생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자식들도 2등 인민으로 전락한 채 북한 사회에 녹아들 수 없었다. 올해는 국군의 날 70주년이다. 목숨 바쳐 조국을 지켰건만 고통과 수모만이 가득했던 그들의 한 맺힌 인생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24살의 앳된 청년은 그해 6.25 전쟁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됐다. 그 후 3년간 치열한 전장을 누볐던 청년은 중부전선의 심장부였던 강원도 금화지구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인민군 복장의 군의관이 상처를 치료 중이었다. 한 청년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이날은 '1953년 5월 26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불과 두 달 전이었다.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 탈북민 손명화씨(56)에게 아버지 고 손동식씨는 평생 풀지 못할 마음의 응어리다. 소녀시절엔 끝없는 원망을, 머리가 굵어졌을 때에는 무한한 연민을 남긴 채 떠난 분이셨다.
■피고름 묻은 군복 입고 버틴 수용소…이후엔 평생을 탄광서
인민군에게 사로잡혔던 아버지는 이후 평안남도 강동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전쟁의 막바지였던 당시 아버지를 포함한 29명의 포로들은 마지막 포로라는 상징성 때문에 수용소에서 '29명조'로 통했다. 포로생활 후 아버지는 무산군에 위치한 광산으로 향했다.
그 후는 말 그대로 노예의 삶이었다. 29명조에게는 전향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때쯤 포로가 됐으니 인민군을 제일 많이 죽였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아버지는 평생 전깃불을 못보고 사셨습니다. 52살에 폐암 진단을 받고서야 탄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일 돌가루를 들이마신 아버지의 폐는 처참히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가족과도 찢어져 무산군 시내에서 70㎞나 떨어진 산골에 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통나무에 진흙을 발라 만든 움막에 살면서 갱도를 지탱하는 갱목용 목재를 조달했다.
그렇게 7년을 홀로 사셨던 아버지는 산송장이 된 채 소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왔다. 병원으로 갔을 때는 암이 퍼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 혼자 남아 간병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통일이 되면 아버지 고향에 꼭 가라. 아버지 묘를 파서라도 거기다가 꼭 묻어다오."
아버지는 행여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평생 숨겨온 비밀도 명화씨에게 고백했다. 당신의 군번은 'K'로 시작했다는 유언이었다. 명화씨가 스물셋이 되던 해, 아버지는 자신이 국군이었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집에 온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1984년 1월 11일 59세의 나이로.
■아버지 주홍글씨에 발목 잡힌 자식들…남편도 떠났다
북한은 악명 높은 연좌제가 적용되는 곳이다. 어머니 집안이 북한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백두산 줄기' 출신이었음에도 명화씨 6남매는 한 명도 출세를 못했다. 연좌제는 명화씨의 발목도 잡았다. 바이올린 연주와 시낭송에 재능이 있었던 명화씨는 청소년 콩쿠르 3등을 기록한 실력에도 예술대학 입시에 번번이 낙방했다.
"시험에서 떨어진 후 너무 허무해서 청진예술단이 되겠다며 3개월 동안 가출을 했어요. 그때 엄마가 청진으로 찾아와 '상처를 받을까 말을 안 했는데, 너희 아버지 때문에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죠. 너무 억울한 마음에 양잿물을 먹고 죽으려고 했으나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살았습니다."
이후 결혼을 결심하고, 경찰과 연애를 했다. 어느 날 그는 '43호'라는 도장이 찍혀있는 아버지의 주민대장을 내밀며 말했다.
"43호는 국군포로라는 뜻이다. 너랑 살면 내가 옷을 벗어야 하니 포기하자."
그 뒤로 장교를 만났다. 결혼을 하고 큰아들을 낳았다. 남편도 진급하면서 앞날이 풀리는 듯했으나 돌연 옷을 벗게 됐다.
"남편 전역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옷을 벗은 이유를 몰랐던 신랑에게 '내 아버지가 국군포로였기 때문이다'란 말은 할 수 없었어요."
명화씨는 고향인 무산군으로 돌아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일자리를 구하던 중 명화씨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됐다. 진실이 밝혀지자 거대한 갈등의 골이 생겨났다.
몇년 뒤 남편은 "내 장래를 위해 더 이상 너하고 살 용기가 안난다"며 집을 나갔다. 혼자 힘으로 억척같이 아이들을 키워나가던 중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시련이 찾아왔다. '고난의 행군'이 닥쳤을 무렵이었다.
<다음화에 계속>
fnljs@fnnews.com 이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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