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의사당 앞에서 15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깃발을 흔드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반대 시위대에 등을 돌린 브렉시트 찬성 시위대가 'EU가 반역자들에게 돈을 줬다', '떠나는 건 떠난다는 뜻이다'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신화연합뉴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자신이 필사적으로 추진하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협상안이 하원 비준에 실패하면서 한 달 만에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메이 총리의 협상안에 반대했던 보수당은 야당인 노동당에 정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이번만은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기한을 2달도 남기지 않은 브렉시트 협상은 다시금 미궁 속에 빠져들었다.
메이 총리는 15일(현지시간) 실시된 하원 투표에서 협상안 비준이 부결된 직후 성명에서 "하원은 의견을 밝혔고 이제 정부는 이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원이 이번 협상안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나 이번 투표에서 하원이 무엇을 원하는 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어정쩡한 협상에 여야 모두 반발
15일 실시된 브렉시트 합의안 투표는 메이 총리의 정치 경력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원의원 전체 634명 가운데 432명이 반대표를 던졌고 찬성표는 202표에 불과했다. 법안이 230표 차이로 부결된 사례는 영국에서 의회정치가 시작된 이래 처음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보수당에서 나온 무더기 반란표다. 메이 총리 지지 세력 196명과 무소속 3명, 노동당 3명이 찬성 입장을 밝혔지만 보수당 내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 118명은 노동당(248표)과 더불어 메이 총리의 협상안을 거부했다.
영국 정부가 1년 6개월여의 협상 끝에 지난해 11월 EU와 합의한 계획은 일단 영국이 오는 3월 29일에 EU 및 EU 관세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한 뒤에 다시 EU와 현재 무관세 무역과 비슷한 수준의 무역협정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애초부터 '탈퇴'를 거부하고 관세동맹에 남기를 원했기에 메이 총리의 협상안을 곱게 보지 않았다. 동시에 보수당은 메이 총리가 약속대로 '완전히' 탈퇴하지 않았다며 반발했다. 여당 내 강경파들은 지난해 11월 협상안에 포함된 '안전장치'가 모호하다며 결과적으로 영국이 EU에 종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전장치는 영국이 구체적인 무역협상 없이 EU에서 분리될 경우 물리적 국경이 맞닿은 북아일랜드 지역을 임시로 EU 관세 동맹에 포함시켜 혼란을 막자는 조항이다. 브렉시트 강경파들은 메이 총리에게 안전장치가 언제 끝나는지 확실한 약속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EU 측은 지난해 11월 협상안을 바꾸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플랜 B' 나올까?
메이 총리는 15일 성명에서 지난 2016년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를 존중하겠다며 EU 탈퇴 여부를 다시 묻는 2차 국민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는 대신 오는 21일까지 '플랜 B'로 불리는 대체 합의안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날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플랜 B를 들어보지도 않고 하원 차원에서 메이 정부의 정당성을 묻는 불신임투표안을 제출했다. 메이 총리는 먼저 지난해 12월 보수당 내에서 제기된 불신임투표에서 가까스로 승리해 자리를 지켜냈다. 코빈 대표는 같은달 법적 구속력이 없는 총리 개인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해 메이 총리에게 경고를 보냈으며 이번에는 내각 총사퇴와 총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부 전체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투표는 한국시간으로 17일 오전 4시에 열릴 예정이다. BBC 등 현지 언론들은 비록 보수당 브렉시트 강경파와 여당 연정인 민주연합당 등이 메이 총리의 협상안에 퇴짜를 놓았지만 보수당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신임투표에서는 메이 총리를 지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경파의 핵심 인물인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은 15일 메이 총리가 사실상 "사망"상태라면서도 불신임투표에서 그를 지지할 테니 다시 EU와 만나 안전장치 조항이 빠진 더 나은 협상을 가져오라고 주장했다. 메이 총리는 자신이 불신임투표에서 승리할 경우 여야 의원들과 만나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듣겠다고 예고했다. 가디언에 의하면 일부 강경파들은 메이 총리에게 안전장치를 협상안에서 빼든가 아니면 차라리 "무역협상 없는(노딜·No deal) 브렉시트"를 질서정연하게 실행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현지 언론들은 이달 초 보도에서 메이 정부가 EU에 탈퇴시기를 연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최악 준비하는 EU
EU 대표들은 투표 결과에 유감을 표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15일 성명에서 "오늘 저녁 투표 결과로 영국이 혼란스럽게 EU를 떠날 위험이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 만큼 EU 집행위는 EU가 (비상상황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도록 비상대책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이 3월 29일 명확한 계획 없이 EU를 떠나는 방법을 영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행운을 빈다"고 지적했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만약 협상이 불가능하고 아무도 노딜 브렉시트를 원하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유일한 긍정적인 해법이 무엇인지 말할 용기를 누가 가질 것인가?"라며 영국이 EU에 남는 것이 낫다고 돌려 말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브렉시트 협상안에 대한 하원의 불만은 원래 지난달 열릴 예정이었던 표결이 이달 15일로 밀리면서 널리 알려졌다. 앞서 전문가들은 표결해 봤자 부결된다는 전망을 앞 다퉈 내놨다.
파운드 가치는 현지시간으로 15일 오전 6시에 1파운드당 1.2915달러에서 표결이 이뤄진 오후 7시 무렵에 1.2688달러까지 내려갔으나 부결이 확정된 이후 약 30분 만에 1.2882달러까지 솟구쳤다. 파운드 가치는 16일 오전 5시 40분 기준으로 1.2857달러를 기록해 전일 대비 0.01% 내려갔다. 표결 전에 마감한 범유럽지수인 유로 스톡스(Stoxx) 50 지수와 영국의 FTSE 100지수는 각각 0.42%, 0.58% 오른 채 장을 마쳤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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