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희 주연의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년)는 가슴 아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다뤘다. 그러나 위안부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인 '낮은 목소리'(1995년)처럼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극영화 '귀향'(2015년)처럼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진 않았다. '아이 캔 스피크'의 영화적 성취는 심각한 역사 문제를 코미디라는 장르로 감싸안았다는 데 있다. 위안부 할머니가 미 의회 청문회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는 설정이 이 영화의 포인트다.
이 영화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김복동 할머니가 28일 밤 별세했다. 김 할머니는 영화 속 이야기처럼 지난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위안부 피해를 직접 증언했다. 물론 영어로 말하지는 않았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만 14세이던 1940년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 꽃다운 인생을 짓밟혔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서의 삶을 가슴 속에만 묻어두지 않았다. 유엔 세계인권대회 참석 이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본군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세상에 알렸다.
사실 김 할머니는 '아이 캔 스피크' 이전에 이미 '무비 스타'였다. 지난 1997년 변영주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2'가 김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김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한 변 감독은 SNS를 통해 "김복동 할머니는 세상 모든 것을 수줍어하고, 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그런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스스로를 밝히고 전선의 맨 앞줄에 힘겹게 섰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김 할머니의 소원은 일본 아베 총리의 진심어린 사과를 직접 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하얀 모시저고리 입고 꽃다운 열네 살 고향 언덕으로 돌아가셨지만, 저세상에서라도 이승의 고통 훌훌 털어버리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3명 남았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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