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노량진 거리 풍경. 사진=김성호 기자
모두가 ‘고향 앞으로’를 외치는 설 연휴에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종 공무원 학원 및 재수학원이 밀집한 노량진 고시촌엔 그런 사람들이 특히 많다. 설 연휴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포기하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이들을 찾아 노량진 고시촌을 방문했다.
설 명절 당일인 5일 오후에도 노량진 고시촌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역 근처 카페에는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몰렸고 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도 여럿 있었다. 트레이닝 복 차림이 많은 걸로 보아 인근에서 온 사람들이 다수인 듯했는데, 대부분은 익숙한 듯 노트북을 켜고 강의를 듣거나 책을 펴고 공부에 열중했다.
■명절귀향 포기하고 공부매진, 새해엔 합격소식 전하고파
설날 노량진 카페풍경. 사진=김성호 기자
아침 9시부터 카페에 나와 5시간째 공부 중이라는 장윤결씨(19)는 지난해 수능시험을 본 직후 경상북도 경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재수를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이다. 장씨는 “나름 준비를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목표했던 학교에 갈 점수가 나오지 않아 재수를 결정했다”며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볼 면목도 없고 오가는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도 부담돼서 서울에 남았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근처 고시원에서 살며 학원 자습실에서 주로 공부하는데 오늘 하루 학원이랑 도서관이 모두 문을 닫아 카페에서 공부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부모님께 새해 인사를 드렸냐는 말에 장씨는 “어젯밤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면서 “당장은 아버지께 죄송하지만 지금 내려가서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 확실하게 결과를 가지고 돌아가는 게 효도이지 않을까 싶다”며 웃어보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카페에서 최대한 오래 공부하려 한다는 장씨의 자리에는 에너지바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장씨처럼 집을 찾지 못하고 공부에 매진 중인 수험생은 처음 찾은 카페에서만 어림잡아 십 수 명에 달했다. 이중 두 번째로 말을 건 이모씨(26·여)는 2년째 경찰공무원을 준비 중인 수험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설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씨는 “집이 서울이긴 한데 나이도 있고 어른들한테 세벳돈을 받는 게 부담스러워 평일처럼 버스타고 학원 근처로 왔다”며 “학원비며 교재비도 모두 받아쓰는 형편이라 올해엔 어떻게든 합격소식을 들려드리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올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느냐고 묻자 이씨는 “시험에 합격하고 돈을 벌게 되면 엄마랑 여행을 꼭 가보고 싶다”며 “대학생 때는 취업 준비로 바빴고 졸업 후에도 시험을 준비하느라 가족들과 마음 놓고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렇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무리 수험생이라지만 연휴인데 쉬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면서도 “여경선발비율이 늘었다고 뉴스가 나왔는데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세상 됐으면"
설날 노량진 카페풍경. 사진=김성호 기자
수험생들의 학구열로 뜨거운 카페는 좀처럼 자리가 비지 않았다. 이곳에서 1년 넘게 근무했다는 점원 조모씨(23)는 “평소에도 공부하러 오는 손님이 많지만 오늘은 설이라서 그런지 더 많은 것 같다”며 “대부분 학원이 문을 닫으니 카페에서 공부를 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서겠지만 오전에 음료 한 잔 시켜놓고 나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서 자리를 오래 비우면 체크해 주의를 준다”며 “나도 비슷한 상황이니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일하다보면 좀 너무하다 싶은 사람들도 있어서 신경이 쓰인다”고 웃었다.
통상 명절 당일이면 쉬는 점포가 많은 다른 지역에 비해 노량진은 카페는 물론 음식점과 각종 편의시설 상당수가 정상영업을 한다.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고 고시촌에 남아서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저녁때가 되자 노량진 컵밥거리엔 점포마다 손님이 제법 들어찼고 저렴한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인기를 끄는 모습이었다.
식사 후 노래방과 플스방, PC방을 찾는 수험생들도 여럿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플스방에서 나온 윤모씨(25)는 “오늘 집에도 못가고 하루종일 독서실에서 강의만 들었는데 그래도 설이니까 나한테 보상을 주려고 나왔다”며 “친구들과 위닝 한 게임이라도 안 했으면 명절이 뭔지도 모를 뻔했는데 이렇게 사람을 만났으니 다시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할 예정”이라고 웃어보였다.
신림동에서 학원을 다니며 로스쿨을 준비하고 있다는 윤씨의 친구 장모씨(26)는 “오늘 오전에 집에서 떡국을 먹고 친구 면회를 왔다”면서 “나도 신림동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집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노량진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안쓰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녀석이나 저나 시험에 꼭 합격해서 오늘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둘 다 합격률이 높지 않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새해엔 노력한 만큼 그래도 조금이라도 돌아오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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