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상태 선장 출항지휘 무방비
현장 출동해 있던 해경도 충돌 못막아
차량통행제한·시민에게 알림 모두 늦어
"작은 고리 이어져 큰 참사 빚는다" 시민 불안
9일 부산 외항에 정선 중인 씨그랜드호 모습. 광안대교와의 충돌로 선수부 구조물이 무너져 있다. / 사진=조용진
광안대교에 러시아화물선이 충돌했다. 출항을 지휘한 선장은 면허취소 수준의 음주상태였다. 광안대교 충돌에 앞서 정박된 요트 등과 충돌사고까지 있었다. 1차사고 이후 해경 구조정이 현장에 출동해 있었고 VTS도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광안대교 충돌을 막지 못했다. 부산시는 충돌 이후 40분이 지나서야 차량통행제한조치를 취했다. 시민들에겐 2시간이 지나서야 사고소식을 알렸다.
9일 다수 해양계 관계자들은 지난달 28일 발생한 러시아화물선의 광안대교 충돌이 항만관리 및 위기대응체제의 총체적 부실을 드러낸 사건이라는데 동의했다. 이번 사건이 삼풍백화점 붕괴·성수대교 붕괴·대구 지하철 화재·세월호 침몰·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등의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 않은 건, 공권력의 효과적 대응 덕분이 아니라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광안대교가 부실하게 시공됐거나 관리되고 있었다면 대형 참사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해경 대처 넘어선 구조적 허점 있었다
광안대교 충돌사고의 일차적 책임은 관할 해경에 있다. 가해선박인 러시아화물선 씨그랜드호(Sea Grand·5998t)가 용호부두를 출항한 직후 요트와 충돌사고를 일으켰고, 광안리파출소 소속 연안구조정이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안구조정은 출동 직후부터 20여 분 동안 피해선박인 요트에서 부상을 입은 선원을 구조하고 피해선박의 침수를 막는데 전념한 것으로 파악됐다.
씨그랜드호는 이 시간 동안 잠시 정선해 있다 독자적으로 이동을 시작해 광안대교와 충돌했다는 게 해경의 주장이다. 상황을 파악한 해경선박이 뒤늦게 씨그랜드호를 뒤쫓았으나 교각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출동 직후 사고선박에 올라 음주측정을 시도하지 않았고 독단적으로 이동하는 가해선박을 제지하지 못한 건 해경의 실책이다. 예인선 등 사고처리에 필요한 선박의 증원이 미리 이뤄졌다면 2차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한 해경에 모든 책임을 지우기엔 어려움이 있다. 사고의 이면에 정책적인 허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씨그랜드호와 같은 상선은 선장이 음주상태에서 출항해도 해경이 이를 파악하거나 제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특히 용호부두와 같은 임의도선구역에선 당장 내일이라도 같은 사고가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 임의도선구역은 도선사 승선이 강제되지 않아 대부분 선박 선원만으로 입·출항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박기간 동안 일부 선박을 대상으로 항만국통제(PSC) 등의 검사가 이뤄지고, 이민·검역·출입국 수속도 진행되지만 요식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선박 입·출항 수속업무를 수행해온 업계 관계자는 “규모 있는 상선에서 음주측정이 이뤄지는 경우는 사고 직후 등 매우 특별한 상황 뿐”이라며 “해사안전법에서 선원에 대한 음주규정을 정하고 있고, 해운사도 별도로 알코올테스트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지만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라고 털어놨다.
■전국 임의도선구역 재정비 시급
용호부두와 같이 국가주요시설물이 인접한 부두를 임의도선구역으로 묶어둔 해양수산부의 조치도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높다. 강제도선구역과 달리 임의도선구역 입·출항 선박에겐 도선사 승선과 예인선 사용이 강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선사와 항해사 등 실제 업계에 종사하는 관계자 다수가 도선사가 승선했거나 현장에 예인선이 있었다면 광안대교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는 상황에서 이 같은 비판엔 의미가 있다.
용호부두 입출항 경험이 있는 선장 최모씨(57)는 "5000t급이면 용호부두에 들어가는 배 중에서는 규모가 있는 선박"이라며 "기본적으로 항내가 좁기 때문에 바우쓰러스터(Bow Thruster·선수 측면에 장착돼 좁은 항구에서 접·이안할 때 보조하는 조종장치)가 없다면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용호부두는 광안대교 개통 이후 무려 16년 동안 관련 논의에서 제외돼 있었던 상태다.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의 관리소홀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전국 임의도선구역에 대한 사고위험성 조사 및 재정비가 시급해 보인다.
부산시민이자 항해사인 강모씨(33)는 "대형참사도 뜯어보면 작은 문제들이 고리처럼 이어져서 발생하는 건데, 광안대교 충돌사고에서도 그런 징후가 많이 보였다"며 "소 잃고 그 축사만 뜯어고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니, 이번 기회에 전국 항만관리체계를 전반적으로 재정비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7일 광안대교 충돌 현장을 찾아 “일자리 대책이 마련될 경우 부산시·부산항만공사와 협의해 용호부두를 조기 폐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며 “협의에 시간이 걸리는 만큼 임의도선구역으로 정해져 있는 용호부두와 다대포항을 강제도선구역으로 전환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pen@fnnews.com 김성호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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