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은사 중에 자신의 집 마당에서 키우던 애완견을 '이토'라고 부르던 분이 계셨다. 예상한 대로 이토의 풀네임은 이토 히로부미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한 선생이 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까닭을 알기에 피식 웃음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한번은 선생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토가 쪼르르 달려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토를 번쩍 들어올린 선생은 "녀석이 제법 나를 잘 따른다"며 껄껄 웃었다.
일본사람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에피소드이지만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에 대한 대접은 이럴 수밖에 없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을 맞고 유명을 달리한 그가 누군가. 한반도 식민지화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 제국주의의 일등공신 아닌가. 그러나 그에 대한 일본에서의 평가는 우리와 180도 다를 수밖에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정부 초대 총리대신을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자, 일본 근대화를 이끈 민족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
일본 정부가 9일 내놓은 새 지폐 도안 때문에 한·일 양국이 시끄럽다. 일본 경제의 상징인 1만엔권 속 인물을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로 바꾸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이토 히로부미의 절친으로 알려진 시부사와는 일본 내에서 '근대경제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다이이치국립은행, 도쿄증권거래소, 도쿄가스 등 다수의 기업을 세웠다. 국내에선 구한말 경부선 철도 건설에 간여하고 경성전기 사장을 지내는 등 한반도 경제침탈의 최선봉에 섰다. 일본 지폐의 얼굴로 그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소식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지폐의 세계사'라는 책을 쓴 대만 인문학자 셰저칭은 "지폐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시대적 기억"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지폐의 도안은 시대와 역사를 반영할 뿐 아니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축한다. 이번 지폐 도안 변경 논란이 아베 정권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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