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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의 News 속 인물] 대통령이 된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박종원의 News 속 인물] 대통령이 된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난 2월 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세트장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자신이 대통령으로 출연하는 현지 정치 드라마 '국민의 일꾼' 시즌 3를 촬영하고 있다.AP연합뉴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는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선생인 바실리 페트로비치 골로보로드코는 어느 날 학교에서 피치 못하게 우크라이나의 부패 정치를 비판하는 열변을 토한다. 그의 연설은 학생이 휴대전화로 찍은 동영상에 그대로 담겼고 인터넷 곳곳에 퍼지게 된다. 자고 일어났더니 순식간에 유명 정치 인사가 된 골로보로드코는 결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고 친구들을 장관에 앉혀 부패 정치를 몰아낸다.

2015년 시즌 1을 시작으로 올해 방영된 시즌 3까지 총 51화가 제작된 우크라이나의 대표 정치 드라마 '국민의 일꾼'은 이처럼 황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가끔 현실은 드라마보다 황당하다. 여기서 골로보로드코역을 맡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우크라 대선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됐다.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취임식을 드라마에서 먼저 연습해 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동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크리비리흐에 1978년 1월 25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젤렌스키는 한국 나이로 올해 42세다. 그는 아버지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식인으로 크리비리흐 경제 연구소에서 컴퓨터와 네트워크 관련 교수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공학자 출신이다. 젤렌스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4년 동안 몽골 에르데네트에 머물렀고 고향에 돌아와 김나지움(중·고등학교)을 거쳐 키예프 국립 경제대학의 크리비리흐 캠퍼스에 들어갔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법률 분야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연예계로 진출했다. 젤렌스키는 이미 17세가 되던 해 러시아의 유명 프로그램인 KVN에 출전했다. KVN은 소련 시절 시작된 코미디 경연 대회로 원래는 소련 내에서 출전한 일반 참가자들이 대결하는 프로그램이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구소련 국가들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등에서도 참가자 접수를 받아 리그를 진행했다. 젤렌스키는 1997년에 우크라이나 대표팀에 끼어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했고 같은해 '크바르탈95(95번 구역)'이라는 코미디 팀을 조직해 KVN 리그에 참가했다. 그는 1998~2003년 사이 동료들과 함께 모스크바와 구소련 지역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젤렌스키는 2003년에 KVN 주최 측과 마찰로 공연을 중단한 뒤 우크라이나로 넘어왔다. 그 사이 크바르탈95는 번듯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로 성장했고 현지 유력 방송국인 1+1TV 및 인테르TV와 계약을 맺었다. 젤렌스키는 2005년에 이제는 현지에서 가장 유명해진 쇼프로그램인 '이브닝 크바르탈'을 선보이면서 우크리의 국민 MC로 유명세를 떨쳤다. 크바르탈95는 이후에도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 등을 제작했으며 젤렌스키는 기획자와 제작자, 각본가 역할까지 해냈다.

그는 2015년 국민의 일꾼이 방송을 타면서 부쩍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극에서 골로보로드코를 연기했던 젤렌스키는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시청자들 사이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통령 후보로 오르내렸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지난해 3월에 크바르탈95 인사들과 함께 드라마 제목을 따서 국민의 일꾼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젤렌스키는 올해 신년 전야에 1+1TV에 출연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같은달 21일 국민의 일꾼 후보로 지명되어 결국 이달 결선 투표에서 현직 페트로 포르셴코 대통령을 꺾었다.

전문가들은 젤렌스키의 승리를 놓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부패한 기성정치에 완전히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민의 약 30%가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는 소련 붕괴 이후 성장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와 결탁한 정치인들의 비리가 극에 달해있다. 지난 2014년부터 동부에서 친러시아 반군과 내전을 이끈 포로셴코 대통령조차 올리가르히 출신으로 현재 2015년에 발생한 대규모 방산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현지 연구기관인 키예프국제사회학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젤렌스키 지지자의 54%는 그를 지지하는 이유로 "기성 정치권 외부에서 온 새로운 얼굴이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그의 "TV 속 대통령 역할이 좋아서"라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 6%에 불과했다.

젤렌스키의 정치적 성향은 아직 불분명하다. 공식적인 정치 경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지난 2013년 우크라에서 러시아와 결별 및 유럽연합(EU)과 통합을 요구하는 유로마이단 시위가 벌어졌을 때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본인부터 러시아를 사용하고 주요 미디어 사업을 러시아에서 벌인 만큼 친러시아 성향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측에서는 친러시아 반군과 전쟁을 지휘했던 포로셴코 대통령보다는 차라리 그가 낫다는 입장이다. 젤렌스키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지지한다면서도 러시아와 대화를 통해 동부 내전을 끝내겠다는 입장이다. 젤렌스키는 우크라 정부가 지난 25일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의무화 시키자 국민의 자유를 해친다며 러시아 정부와 한목소리로 이를 비난했다. 현지 언론들 사이에서는 정경유착을 뿌리 뽑겠다던 그가 사실 금융 올리가르히인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결탁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드라마 속 골로보로드코와 젤렌스키는 다른 인물이다. 골로보로드코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지만 젤렌스키는 지난 2017년 기준 공식적으로만 연 17만8471달러(약 2억711만원)를 벌었고 영국산 고급 SUV를 타고 다닌다. 확실한 것은 젤렌스키 또한 골로보로드코가 극에서 취임 직후 겪었던 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