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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날 보러 와요'

"자, 이제 말해봐. 어차피 넌 못 빠져나가. 혈액형은 이미 B형으로 확인이 됐고 이제 DNA 감식 결과가 나와. 다 털어놔, 사실대로." 그러나 용의자는 끝끝내 범행을 부인하고, 감식 결과는 예상과 달리 불일치 판정이 난다.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범인 체포에 대한 형사들의 강박도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1996년 초연)의 한 대목이다.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은 2003년 개봉한 '살인의 추억'이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년)가 쫄딱 망한 뒤 절치부심하던 봉 감독은 차기작으로 미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한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김광림 작·연출의 연극 '날 보러 와요'다. 미궁에 빠져있는 사건을 통해 '진실의 모호함'이라는 주제를 잘 드러낸 이 연극은 초연 이후 호평을 받고 있던 대학로 히트작이다.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불러모으며 화제를 모았던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극 '날 보러 와요'에 많은 부분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시골 형사와 김상경이 연기한 서울 형사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 전개나 FM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을 이용한 수사방식 등은 연극에서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왔다. 진실 찾기라는 큰 주제 아래 국가시스템의 부재와 무능을 비판적으로 그린 점도 다르지 않다. 또 연극 무대에 올랐던 배우 류태호, 김뢰하 등은 영화에도 얼굴을 비친다.


30여년 만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지목되면서 두 작품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봉 감독은 영화 개봉 당시 "작품 준비를 위해 실제 사건을 수사했던 형사, 지역주민 등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범인이었다"면서 "범인이 이 영화를 보러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날 보러 와요'라는 연극 제목도 범인이 객석 어딘가에 앉아 자신을 잡지 못하는 이 사회를 조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지은 것이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