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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日시민들의 59일간의 표현의 자유 사수戰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전시 이르면 6일 재개 
평화의 소녀상, 아시아 위안부, 쇼와 일왕 불타는 사진 등 공개 
일본 시민사회의 저항이 전시 재개로 이끌어 
10월 14일 아이치 트리엔날레 폐막시까지 
약 6~9일간 일반에 공개 



[특파원리포트] 日시민들의 59일간의 표현의 자유 사수戰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 아이치문화예술센터 내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 '전시장 앞, 시민들이 전시 재개를 염원하며 붙인 희망메시지가 가득하다. 안세홍 작가 제공

【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아이치문화예술센터 8층에 위치한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전시장.

지난 달 3일 전시 중단 결정 이후 출입을 막고자 두 달 넘게 세워진 가벽엔 색색깔의 메시지 수만장이 붙어있다. 전시 재개를 염원하는 평범한 일본 시민들이 붙인 '희망 메시지'들이다.

가벽 뒤엔 일본군 위안부를 형상화한 한국 작가 김서경·김서운의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해 안세홍 작가의 일본군 아시아 위안부 사진, 일본 작가 오우라 노부유키의 쇼와 일왕의 얼굴이 불타는 작품 등이 걸려있다. 그간 일본 우익들의 타깃이 된 문제작들이다.

이르면 6일, 늦어도 8일 이 가림막이 극적으로 철거된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당국의 검열과 표현의 자유 침해에 저항한 일본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재개에 앞장선 오카모토 유카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시 내용 문제가 없다고 당당하게 재개돼야 작품 내용에 개입하는 문화청 검열에 싸울 수 있다"는 글을 올렸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전 실행위원인 그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뛰어든 건 2012년 도쿄 니콘살롱 위안부 사진전 취소 사태때부터다.

당시 안세홍 작가의 위안부 사진전이 우익들의 반대로 열리지 못하게 되자, 뜻있는 활동가들과 함께 저항했던 사건이다. 안 작가와 오카모토씨를 비롯해 교수, 평론가, 전시기획자, 변호사 등이 자연스럽게 한 팀이 됐다. 법원으로부터 전시 중시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7년 전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위안부 사진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후 2015년 이를 모티브로 삼은 '표현의 부자유전'이 열리게 됐고, 당시 전시를 관람한 츠다 다이스케 예술감독이 깊은 인상을 받고 이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국제예술제인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의기획전으로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전시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표현의 부자유 문제를 극복해보자는 취지였다.

[특파원리포트] 日시민들의 59일간의 표현의 자유 사수戰
'표현의 부자유전, 그후'전시 중단에 항의하고 있는 시민들. 안세홍 작가 제공
그러나 예상대로 우익의 협박과 반발이 거셌다. 아이치현 트리엔날레의 조직위원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가 결국 안전상의 문제를 이유로 전시 개막 사흘 만인 지난 3일 중단 결정을 내렸고, 뒤이어 최근 일본 정부가 아이치 트리엔날레 보조금 취소 등의 압박을 가하면서 그렇게 쐐기를 박는가 싶었다.

하마터면 표현의 자유문제에 대한 일본의 현주소로 각일될 뻔했던 이 사건에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지난 9월 30일의 일이다. 나고야 지방법원에서 오무라 아이치현 지사와 표현의 부자유전 측 실행위원들이 전시 재개로 화해한 것.

[특파원리포트] 日시민들의 59일간의 표현의 자유 사수戰
안세홍 작가
안세홍 작가는 본지 인터뷰에서 이번 재개 결정에 대해 "시민들의 연대가 낳은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전시 중단 결정 이후 두 달여간 거의 매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가량, 나고야 시민들이 아이치문화예술센터 앞에 모여 전시 재개를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였다. 한 음악가는 노래로 표현의 부자유 문제를 비판했으며, 어떤 시민은 조그만 소녀상을 들고 나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당국의 결정에 저항했다. 안작가 등 전시 참여작가들은 지난 8월과 9월 도쿄와 나고야에서 연이어 강연에 나서는 등 일본 시민사회에 이 문제를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안 작가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돈 주고 합의했으면 다 해결된 게 아니냐"는 식의 퇴행적 인식을 보였던 일본 사회가 이번 재개 결정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역사를 만들었다"며 "무엇보다 시민의 힘으로, 한 발짝 나아가게 된 게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의 보조금 취소 결정 이후 "예술에 대한 이지메(괴롭힘)을 중단하라", "예술을 지키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나고야와 도쿄 가스미가세키 문화청 앞에서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판 블랙리스트'에 대한 저항이다. 일본 청원 사이트 체인지에는 1일 오전 9시 58분 현재 보조금 취소 철회를 요구하는 청원에 찬성한 이들이 9만3700여명을 기록했다.

시민연대와 더불어 오무라 지사의 변심도 역할을 했다. 당초 전시 중단 결정을 내리면서도 표현의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애매한 입장에 섰던 오무라가 재개 합의로 돌아선 건 일본 정부가 아이치 트리엔날레 보조금 취소 압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감독 모리 타츠야는 아사히신문에 "(이 사건이)10년, 20년 후 표현의 자유를 잃어버린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게 됐다(지키게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