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초유 무관중·무중계
남북 대화·협력 이어가되
北 개방 이끌 의지 있어야
남북 간 지난주 2022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관중도, 중계방송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축구 더비'(영국 BBC 방송)가 치러지면서다. 축구팬들로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온갖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이 시대에!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 풍경은 으스스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스페인 매체 문도 데포르티보가 "유령경기가 펼쳐졌다"고 평가했겠나. 욕설과 백태클 등 북한 선수들의 거친 매너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측의 '붉은 악마'는커녕 북측 응원단조차 없이 북한 군인들이 에워싼 괴괴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당연히 여러 뒷말이 나왔다. 무관중 경기는 북한 세습체제의 속성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김일성 이름이 붙은 경기장에서 혹여 남한 선수가 팬덤에 오른다면 '최고 존엄'의 권위에 금이 갈 수밖에 없어서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공사가 "만약 한국이 이겼다면 손흥민 선수 다리 하나가 부러졌든지 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배경이다.
북측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는 광경을 북한 주민들에게 보이길 꺼렸다는 사실은 제쳐두자. 돈벌이가 되는, 한국의 생중계와 취재진 입국까지 마다한 데는 다른 연유가 있을 법하다. 북핵제재 등과 관련, 남한을 압박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스포츠 이벤트의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동떨어진 행태다.
그런데도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국정감사장에서 "북한이 자기들 나름대로 공정성의 조치를 취한 것이란 해석도 있다"고 했다. 남측 응원단을 받지 않았기에 북측 관중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형식 논리다. 그러나 우리 선수단이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악몽을 떠올리는 판이라 여간 생뚱맞게 들리지 않는다.
북한의 시대착오적 기행은 일단 논외로 치자. 북한 정권이 정상적 국제 스포츠 규범에 따르도록 설득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끌려가는 것도 큰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를 거듭 제안했다. 하지만 최소 수조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될 평양 경기가 무관중·무중계로 치러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문재인정부는 취임 초부터 북한과의 대화라면 열일 제쳐놓고 매달려왔다. 그런데도 북측으로부터 "삶은 소가 웃을 일"이라는 등의 막말을 듣기 일쑤였다. 정부가 아무리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한들 북한 정권이 세습체제가 흔들리는 선택을 할 개연성은 희박하다는 얘기다. 평양에서 벌어진 이번 '유령경기'가 그 방증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화와 협력의 기조는 이어가더라도 북한 정권의 퇴행적 행태에 눈감을 이유는 없다. 북한 3대 세습독재 체제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길을 차단하는 것은 진보정권이 취할 태도일 순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서 이벤트성 협력에 골몰하다보면 그 종착역은 남북의 하향 평준화다. 이는 인류문명사의 큰 흐름에 역류하는 꼴이다.
그래서 문재인정부의 남북협력 정책에 북한 체제의 개혁·개방을 이끌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깃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솝우화를 원용한 햇볕정책이란 용어 그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다만 따뜻한 볕만 주자는 게 지상목표라면 우화의 취지를 왜곡하는 일이다. 햇볕을 쬐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뭔가 변화를 일구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진정한 남북협력은 그 과정에서 북한에도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복지가 이식돼 민족공동체가 동질성을 확보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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