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아 변호사
실명 등 인적사항 노출에 부담
성범죄 민사소송도 ‘가명’ 써야
'비동의 간음죄' 섣부른 도입보다
국민 인식변화 거쳐 단계적 추진
피해자들 회복되는 모습에 보람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자기 아픔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깨닫고 말할 수 있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으론, 변화된 사회적 분위기를 관련 법규가 따라가지 못한 부분들도 있다."
성범죄 피해자 측의 법률대리인으로 활동해 온 장경아 변호사(42·사법연수원 41기·사진)는 9일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에 대해 이 같이 평가했다. 장 변호사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을 맡았다.
■"성범죄 민사소송도 가명조서 필요"
이 전 감독의 재판에서 증언대에 선 피해 여성단원들은 증인신문 내내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감독이 아니라 수의를 입은 피고인에 불과했지만, 얼마 전까지 연극계에서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존재감에 짓눌렸다.
장 변호사는 "피고인과 증인 사이에 가림막이 쳐졌지만, 이윤택 전 감독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증인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변호인과 메모를 주고받는 모습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증인들은 한 때 존경했던 선배이면서 고통을 주는 가해자이기도 한 이윤택 전 감독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며 "정신적인 충격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실만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감독은 징역 7년형을 확정 받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여전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장 변호사는 전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피고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는 것도 주저하고 있다. 교도소에 갇혔더라도 가해자에게 자신이 노출되는 게 무서운 것이다.
장 변호사는 "형사 사건에선 수사기관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조사할 때 인적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가명조서'를 쓸 수 있다"며 "다만 성폭력 피해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는 가명을 쓰지 못하고, 실명으로 소송에 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민사적 책임까지 물리고 싶지만, 소송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 인적사항을 적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소송을 포기하기도 한다.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 민사소송의 소멸시효가 지나기도 한다.
장 변호사는 "이는 결국 피해회복을 더디게 만들고,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이윤택 사건에서도 소멸시효가 지나 소송에 나서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 전 지사의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비동의 간음죄' 도입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내비쳤다. 현행법 체계를 바꿔야하는 만큼 섣부른 도입보다 국민의 인식 변화를 거쳐 입법논의를 하는 방식으로 단계적 도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장 변호사는 "강간죄의 범위가 너무 좁다는 점에서 '비동의 간음죄'는 피해자를 명시적으로 보호하는 데 도움 될 수 있다"며 "다만 현행 법규상 처벌조항과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인지 감수성'의 경우 비동의 간음죄처럼 없었던 개념이 아니라 과거부터 존재했음에도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한 후에야 적용되기 시작했다"며 "비동의 간음죄는 현행법을 전체적으로 바꿔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사회적 여건이 되는지 확인하는 과정부터 필요하다"고 밝혔다.
■"회복하는 피해자 모습에 큰 보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묻는 질문에 장 변호사는 "초안산 사건"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는 지난 2011년 서울 도봉구 초안산에서 고등학생 22명이 여중생 2명을 집단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장 변호사는 당시 피해 여중생의 법률대리인을 담당했다.
"해바리기 센터에서 피해자 첫 진술을 듣고 나오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변호사님 저 괜찮을까요?'라는 피해자의 물음에 마음이 아팠다"며 "피해자가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행이다 싶었다. 피해자 사건을 맡을 때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회복되는 모습을 볼 때가 특히 뿌듯하다"고 장 변호사는 털어놨다.
장 변호사는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으면 어떡하나'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며 "오히려 '내가 고소당하면 어떻게 되나'라는 생각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이 겹치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 한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미성년자 사건에선 피해자의 신상이 털리거나 피해 영상을 애들끼리 돌려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부분들을 신속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규제가 시급하다"며 "또 해바라기센터나 법무부 스마일센터 등 성범죄 피해여성을 지원하는 제도를 홍보하고, 피해자들이 회복될 수 있는 사회적 지원도 늘길 바란다"고 말했다.
fnljs@fnnews.com 이진석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