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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정부는 보증 서고, 한은은 회사채 매입 나서길

한국판 양적완화 바람직
기업에도 신용 물꼬 터야

한국은행이 크게 움직였다. 26일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한국판 양적완화(QE) 결정을 내렸다. 금융시장에 4~6월 석달간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방법은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이다. 은행·증권사 등 금융사가 보유한 국채·공기업채 등을 한은이 사들이면 그만큼 돈이 시장에 풀린다. 윤면식 한은 부총재는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시장의 유동성 수요 전액을 제한 없이 공급하기로 결정한 조치는 사실상의 양적완화 조치로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한은으로선 가보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외국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10여년 전 금융위기 당시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보였고, 성과를 거뒀다. 현 제롬 파월 의장 역시 지난 23일(현지시간)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했다. 심지어 파월 의장은 기업어음(CP)은 물론 회사채까지 매입 대상에 넣었다. 투자등급 이상이라는 조건을 걸었지만, 연준이 회사채 매입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CP는 기업이 단기자금을 조달하는 창구이고, 회사채는 장기자금을 마련하는 통로다.

연준과 비교하면 한은의 무제한 양적완화 카드는 한계가 있다. 한은이 공급하는 유동성이 금융사로만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금융사 자금이 넉넉해지면 기업도 낙수효과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제 논에 직접 물을 대는 것만은 못하다. 연준이 CP와 회사채까지 직매입에 나선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은도 가능성을 내비쳤다. 윤면식 부총재는 "정부가 보증만 한다면 회사채 매입도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은행법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한은은 '원리금 상환을 정부가 보증한 유가증권'을 매입할 수 있다(68조①항2호). 국채 또는 공기업이 발행한 채권 외에 회사채까지 사들이려면 먼저 정부 보증이 필요하다는 게 한은의 주장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사실 연준도 미국 재무부가 보증한 회사채만 매입할 계획이다.

우리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길 바란다. 정부가 회사채 보증을 서려면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만에 하나 회사채 투자에서 손실이 나면 세금으로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대로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다.

한은에도 한 가지 더 주문할 게 있다. 행여 훗날 책임 추궁이 두려워 보증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는 것이어선 안 된다. 한은법엔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 영리기업에 여신할 수 있다'(80조①항)는 조항도 있다.
시각을 '안 되는 쪽'에서 '되는 쪽'으로 바꾸면 얼마든지 길이 보인다. 중앙은행은 위기 때 라스트 리조트(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라고 만든 제도다. 지금이야말로 한은이 그 역할에 충실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