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권대희 사건' 두 번째 공판 열려
'사람 죽었지만 잘못 없다' 주장... 유족 '격노'
법정 찾은 수십명 인파... 이씨에게 '응원세례'
[파이낸셜뉴스]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권대희씨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7일 오후 2시50분, 서울중앙지법 522호 법정 앞 좁다란 복도에 사람들이 죽 늘어섰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보기 드문 사례로, 법원 관계자들도 무슨 사건으로 사람들이 모였는지 궁금해 했다.
이날 여러 건의 재판을 함께 진행한 법관이 사람들에게 “무슨 사건으로 모였느냐”고 묻자 청중 한명이 나서 “권대희 사건”이라고 답했다.
경희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6년, 강남 성형외과가 일으킨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권대희씨 사망사건 두 번째 공판이 열린 날의 일이다.
수많은 취재요청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기자도 법정을 찾지 않았다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온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왜였을까.
이씨에게 이유를 물으니 “너무 많은 분들이 오셨다”는 답부터 돌아왔다. 법정에 들어가는 길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혹 권대희 어머님 아니세요?”하고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답하니 “큰 용기 내주어 고맙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든 돕고 싶다”며 응원을 하더라는 것이다. 약속도 안 되어 있던,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지지와 관심이 어찌나 큰 힘이 되었던지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권대희 사건' 두 번째 공판이 열린 7일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가 받은 손편지. 지난 4년 간 홀로 싸움을 지속해온 이씨에 대한 연민과 공감, 응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나금씨 제공.
■사실은 맞는데 혐의는 인정 못해
응원은 응원이고 재판은 재판이다. 피고인으로 출석한 의료진들은 이날 법정에서 자신들의 주요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 공소장에 나온 사실관계는 인정하지만 과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독특한 입장이었다. 이에 판사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증거와 사실관계를 모두 인정하지만 과실은 인정하지 않으니, 그에 대한 법적인 판단을 해달라는 것이냐” 하고 물었다. 피고인 측은 “그렇다”고 답했다.
도대체 이들이 인정한 사실관계는 무엇일까. 본 기자가 이미 수차례에 걸쳐 다룬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다루기로 한다.
경찰이 2년 여 동안 수사한 사건을 다시 1년 여 간 재수사해 핵심 쟁점으로 꼽히던 의료법 위반 혐의를 불기소 처분한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당시 부장 강지성·현 부장 이창수) 성재호 검사는 공소장에서 문제 성형외과의 수술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마취과 의사가 환자를 마취하면 원장이 환자의 뼈를 자른다. 다음으로 보조의사가 원장이 절골까지만 진행한 부위를 세척한 뒤 절개부위를 봉합하고 얼굴 부위에 붕대를 감는다. 당혹스러운 점은 이 과정이 한 수술실이 아니라 여러 수술실에서 연달아 벌어진다는 데 있다.
권씨가 수술 받던 당시에도 모두 세 곳의 수술실에서 동시 수술이 진행됐다.
성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은 ‘수술이 연이어 시행되었고 이러한 수술 진행 방식에서는 수술에 관여하는 의사들이 각 환자의 출혈 정도 등을 고려한 건강 상태에 대해 적절한 관리를 할 여유 없이 연속적으로 수술만 진행하게 되는데 이는 위 성형외과 원장인 피고인이 고안한 방식’이라고 적고 있다.
검찰은 이 같은 수술이 이뤄지는 이유에 대해 ‘단시간 내에 많은 환자의 수술을 시행하기 위해’라고 적시해, 해당 병원의 수술방식에 따라 의료진이 각 환자에게 적합한 관리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본지 2월 1일. ‘[단독] 검찰, '권대희 사건' 전문감정과 정반대 결론... '봐주기 수사' 의혹’ 참조>
지난달 10일 고 권대희씨의 친구 노경민씨와 함께 경희대학교 서울 캠퍼스를 찾은 이나금씨가 대학교 본관 건물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2016년 서울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다 의료사고로 중태에 빠져 사망한 권씨는 끝내 이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사진=김성호 기자
■민사에선 ‘책임 80%’ 인정했는데
권씨를 수술한 집도의 장모씨와 그를 대신해 수술을 이어받은 의사 신모씨는 이날 혐의를 부인했다. 환자가 마취된 뒤 사전에 합의된 의사가 수술 중 다른 수술을 하러 나가고 신참내기 의사가 대신 수술을 진행한 사실, 같은 시각 3개의 수술실을 오가며 수술한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부인한 것이다.
이날 공판장에 자리한 한 변호사는 “기본적 사실관계를 인정하지만 범죄 구성요건 중 업무상 과실 부분은 부인하는 취지로 보인다”며 "업무상 과실치사의 공소사실에 있어 업무상 과실을 다투는 것은 범죄사실을 전부 다투는 것이므로 기본적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의미 있지도 않다"고 분석했다.
이는 ‘사실은 맞지만 내 잘못은 아니다’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상해, 사기죄는 물론이고 35분여에 걸친 간호조무사의 단독 지혈행위에 대해 의료법 위반 혐의조차 기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피고인 측이 처벌수위가 낮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공식화된 것이다.
유족들과 현장에 자리한 수십 명의 방청인들이 분개한 이유다.
더욱 충격적인 건 의료진이 이미 민사재판에서 과실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민사를 맡은 1심 재판부는 지난해 5월 병원 측 배상책임을 80%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양측이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경찰과 검찰이 무려 3년 여 동안 수사를 끈 탓에 이례적으로 민사가 형사보다 먼저 매듭지어진 결과다.
요컨대 민사소송에서 과실을 인정해 배상책임 80%를 진 병원과 의료진 측이 형사재판에서 입장을 번복한 꼴이다.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은 어미가 돼 4년 째 싸움을 이어온 이씨 입장에선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이에 대해 이씨는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고 법정에 들어갔는데 막상 재판이 시작되니 피고인 변호사들이 너무 충격적이고 뻔뻔하게 변론해 아직까지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며 “너무 화가 나 상대 변호사한테 ‘지옥까지 따라가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냥 웃어버리더라”고 원통해했다.
2016년 서울 신사역 인근 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다 중태에 빠진 권대희씨 수술 당시 CCTV 영상. 수술실에 남은 간호조무사 한 명이 휴대폰을 만지고 있다. 의무기록지와 비교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당시 환자 혈압이 80까지 떨어진 상황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7일 공판에서 의료진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고 권대희씨 유족 제공.
■‘과실 없다’ 주장하는 수술실에서 벌어진 일
유족이 극적으로 확보한 수술실CCTV 영상은 검찰 공소장에 언급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집도의가 뼈를 절개한 뒤 환자가 지혈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실을 나가고,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젊은 의사가 이를 이어받아 처치한다. 하지만 그조차 지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수술실로 자리를 비운다.
권씨가 무려 45kg 성인여성 혈액 전체에 해당하는 3500cc의 피를 흘리는 동안 '이 수술실, 저 수술실'을 오간 마취과 의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히 필요한 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병원엔 준비된 혈액조차 없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와중에 간호조무사들은 피로 흥건한 바닥을 밀대로 여섯 차례나 밀었다. 수술이 끝나고 지혈이 되지 않는 동안 네 차례나 더 닦아야 했을 만큼 권씨는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지혈이 안 돼 회복실로 올라가지 못하고 수술실에 남아있던 권씨를 두고 퇴근해버렸다. 수술실에 홀로 남은 간호조무사는 휴대폰을 보고 화장도 고쳤다. 한참이 지나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될 때까지도 권씨는 혈액을 수혈 받지 못했다.
업무상 과실에 해당하지 않으려면 통상의 노력을 다해도 사건을 막을 수 없었어야 한다. 과연 그러했나.
유족과 경찰이 보건복지부 등 모두 6개 전문기관으로부터 12차례에 걸쳐 받은 감정회신들에선, 경험 있는 의사가 권씨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술했다면 이러한 결과를 막을 수 있었으리란 내용이 담겨 있다.
심지어 권씨는 병원으로부터 원장이 수술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내용을 듣고서 수술대에 올랐다고 알려졌다. 수술 당일 아침까지 환자와 함께 있었다던 친구 노경민씨(29)는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원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한다고,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해서 (대희가 수술을) 거기서 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본지 3월 14일. ‘사람이 죽었는데 '14년 무사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참조>
재정신청이 접수된 의료법 상 무면허 의료행위는 물론 형법 상 사기나 상해죄 이상도 충분히 다퉈볼 만한 사안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중 어떤 혐의도 적용하지 않았다. 피고인 측이 부인한 업무상 과실치사가 인정되더라도 의사 면허 제한이나 병원 영업정지 처분은 불가능하다. 징역형조차 끌어내지 못할 것이란 부정적 시각이 만연하다.
권대희 사건 다음 공판은 5월 21일로 예정돼 있다. 권씨 어머니 이나금씨의 피해자 진술도 이날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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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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