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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코로나 헛발질에… 명암 엇갈린'포스트 아베' [글로벌 리포트]

고이케 도쿄도지사
정부보다 앞선 정책으로 인기 급상승
니카이 간사장
포스트 아베 후보군들 러브콜 쏟아져
기시다 자민당 정조회장
작년 9월 개각이후 아베와 삐끗
스가 관방장관
코로나 정책에선 완전 배제돼

아베 코로나 헛발질에… 명암 엇갈린'포스트 아베' [글로벌 리포트]
【 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 정가가 심상치 않다.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여론 악화에 시달리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0만엔 현금급부' 정책으로 당정 간 불협화음까지 빚으면서 정권 붕괴로 가는 전조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자민당 내에서조차 총리의 독단과 아집을 꼬집어 "정권 말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통탄할 정도다. 당의 위기감은 선수교체, 정국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자민당 내에선 아베 총리의 6월 실각설을 제기하는 마당이다. 아베 총리의 실책은 누군가에겐 덩달아 '위기'요,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다. '포스트 아베' 차기 총리주자들의 명운이 엇갈리는 모양새다. 코로나19 사태가 정국개편의 주된 변수로 부상하면서 포스트 아베들의 몸풀기가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자민당 킹메이커들의 움직임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누가 울고, 누가 웃을지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아베 코로나 헛발질에… 명암 엇갈린'포스트 아베' [글로벌 리포트]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로이터 뉴스1

■'선전전의 여왕' 고이케

코로나19 정국의 최대 수혜자라 함은 단연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라고 할 수 있다. 고이케 지사는 아베 총리나 일본 정부보다 앞서서 '도쿄 봉쇄' 가능성은 물론이고, '감염폭발 중대국면'을 외치며 코로나19 확산에 경고사인을 보냈다. 이달 들어선 거의 매일 오후 6시30분~8시께, 저녁 황금시간대에 마치 뉴스 앵커처럼 앉아 코로나19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는 7월 도쿄도지사 재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거전은 없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의 깔끔한 말솜씨, 트레이드 마크인 진한 화장, 각종 무늬가 들어간 천마스크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근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자숙을 촉구하는 내용의 TV 광고까지 찍었다.

무관심보다는 악평이 낫다는 정가에서 '선전전의 여왕'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일부에선 고이케 파워가 과거 '도쿄도가 일본 전체를 움직인다'고 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재임기간 1999~2012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아베 내각이 난색을 표했던, 자발적 휴업점포에 대한 지원금 정책은 이미 주요 광역지자체로 확산되면서 고이케가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소규모 점포 등 소상공인을 당원 및 지지층으로 두고 있는 공명당과 자민당 본류로 복귀하기 위해선 세 불리기가 필요했던 고이케의 합작품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2016년 도지사 선거 당시 아베 총리가 다른 후보를 밀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돌풍을 일으킨 고이케는 재선에 도전하며, 자민당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의 지원을 물밑에서 약속받았다. 재선 시 친정 복귀는 물론이고, 나아가 총리 후보군 대열에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킹메이커' 니카이 존재감 과시

81세의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중의원 12선)은 지난 22일로 간사장 재직일 통산 1359일을 찍으며, 모리 요시로 전 총리(현 도쿄올림픽조직위원장)의 간사장 기록을 제치고 역대 2위 기록을 차지했다. 오는 9월 8일이 되면 '정치스승'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총리 재임 1972년 7월~1974년 12월)을 넘어 역대 최장 간사장이 된다.

니카이 간사장이 노익장을 과시한 건 다름아닌 10만엔 현금 급부정책이다. 아베 총리와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이 만든 '소득기준 가구당 30만엔 급부 정책'의 판을 뒤엎은 것이다. 현금 급부를 골자로 한 추가경정예산안이 이미 각의(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 처리를 앞둔 상황에서 정책이 바뀐 건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아베 총리를 만나 전 국민 1인당 10만엔씩 현금을 주는 것으로 '담판'을 지은 것으로 돼 있으나, 그에 앞서 당내 2인자인 니카이 간사장의 1인당 10만엔 주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카이 간사장은 지난 2017년 당내 반발을 틀어막고, 자민당 총재 연임규정을 고쳐(2연임·6년→3연임·9년) 아베 총리에게 3연임을 안겨줬다. 아베 총리 장기집권의 일등공신이자 킹메이커였던 것.

그러나 최근 둘 사이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최근 아베 총리의 잇단 실책으로 자민당이 공멸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제기되자 주변에 아베 총리 '6월 퇴진설'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국회가 있는 나카타초(한국의 여의도 격)에선 니카이파(소속 중의원 40여명)를 이끌고 있는 그가 '누구와 손잡느냐'가 차기정권 탄생의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니카이가 '키맨'이란 얘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나 도쿄도지사 재선을 발판으로 차기 레이스를 노리는 고이케 지사 등 포스트 아베 후보군들이 니카이 간사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등 그를 우군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베 코로나 헛발질에… 명암 엇갈린'포스트 아베' [글로벌 리포트]
지난 24일 도쿄 신주쿠에서 코로나19 확산을 피해 '집에 머물러달라'는 내용의 가두캠페인을 벌이는 도쿄도청 직원들. AP뉴시스


■'체면 구긴 포스트 아베' 기시다

아베 총리는 차기가 누가 될지 공개적으로 밝힌 바는 없으나, 이번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 정가에선 아베 총리가 4연임에 나서지 않는다면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당 정책위의장)이 사실상 추대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시바 전 간사장과 과거 2012년, 2018년 두 차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맞붙었던 좋지 않은 기억도 있고 기시다 정조회장이 잠자코 순서를 기다렸던 측면도 있기에 아베 총리가 이번엔 기시다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그가 아베 총리의 코로나19 실책의 최대 희생양이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초 아베 총리와 보조를 맞춰 소득이 감소한 가구에 한해 30만엔을 주는 정책을 추진해 온 그는 각의까지 통과한 정책이 당 2인자인 니카이 간사장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합작으로 1인당 10만엔으로 수정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으면서 정조회장으로서 체면을 구겼다. 자민당의 한 참의원은 최근 아사히신문에 기시다를 가리켜 "가장 큰 망신을 당했다"며 "당내 구심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1일엔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휴업을 실시한 점포에 지원금을 주는 정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도 고이케에 밀려 뒷북정책이란 평가가 나온다.

니카이 간사장과의 알력싸움이 원인이 됐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3일 총리관저에서 아베 총리와 회동 직후 "소득이 감소한 가구에 30만엔을 지급하는 문제에 대해 총리와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힌 직후 니카이 간사장이 "간사장실에 일절 상담이 없었다"면서 진노했다고 보도했다.

니카이와 기시다 간 갈등이 촉발한 건 지난해 가을이다. 아베 총리가 니카이 간사장을 제치고 기시다를 새 간사장에 올리려 했던 게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양측 간에 종종 충돌이 있었으나, 이번엔 선을 넘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시다 정조회장이 이끄는 파벌인 굉지회(기시다파·중의원 49명)는 경제정책 중심의 친아시아정책을 표방하는 자민당 온건파 계열이다.

아베 코로나 헛발질에… 명암 엇갈린'포스트 아베' [글로벌 리포트]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힘빠진 레이와 아저씨' 스가

지난해 일본의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발표해 일명 '레이와 아저씨'로 한때 포스트 아베 후보군에 포함됐던 스가 요히시데 관방장관의 존재감은 최근 크게 약화됐다.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인 스가 장관은 노련하고 매끄러운 브리핑, 실수하지 않는 브리핑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전형적 참모 스타일로 정권의 위기관리를 담당해 왔다. 그런 그가 최근 총리관저의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면서 아베 내각의 우왕좌왕이 심화됐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른바 '위기관리 시스템의 붕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스가 장관이 가구당 30만엔 현급 급부정책이 1인당 10만엔으로 뒤집히는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기존엔 스가 장관이 니카이 간사장, 공명당과 관저를 잇는 '파이프' 역할을 해 왔으나, 이번엔 아베 총리 주변의 참모들이 정책을 주도하면서 스가 장관이 배제됐다는 것. 최근 일본의 시사잡지 주간 문춘은 국민적 공분을 산 '아베노마스크'로 불리는 천마스크 정책을 내놓은 건 다름아닌 경제산업성 출신의 관저 참모인 사에키 고조 총리 비서관이었다고 폭로했다. 이런 정책 결정 과정에 스가 장관이 제대로 관여하지 못한 게 패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스가 장관은 이미 포스트 아베에서 멀어진 상태다.
아베 총리와 스가 장관 간에 금이 간 건 지난 9월 개각 이후부터다. 스가 장관이 추천한 장관 두 명이 비위로 날아가면서 입지가 좁아진 데다 '벚꽃보는 모임' 스캔들 때나 지난 2~3월 크루즈선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을 때도 스가 장관의 대응에 아베 총리의 불만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저 참모들이 주도한 갑작스러운 휴교령, 긴급사태 선언 늑장대처, 천마스크 정책, 휴일 트위터 투고는 이보다 더 큰 악수였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