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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0주년] 김남규 시의원. 1980년. 다시 돌아가도 학생운동 한다

5·18 민중항쟁 전북동지회 10년 회장 맡아
50여명 회원이 지금은 30명도 채 안 남아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헌법에 담겨야 

[5·18 40주년] 김남규 시의원. 1980년. 다시 돌아가도 학생운동 한다
김남규 전북 전주시의원은 5·18 민주화운동 전후 학생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런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파이낸셜뉴스 전주=김도우 기자】 “당시 후배들을 놓고 선배들은 학교를 빠져 나왔다. 계엄군에 의해 후배들이 짓밟히고 두들겨 막고 모두 감옥 가거나 징집 당했다”
1980년 5월 김남규 전북 전주시의원은 대학(전북대) 4학년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도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나 김 의원도 수배생활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검거돼 모진 고문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김 의원은 태생적으로 좌익이다. 77학번인 그는 3남6녀 중 끝에서 두 번째다.

당시 형님, 누님은 모두 대학생이었으니 자연스레 정부 비판을 들었다.

아버지는 전주농고 수석으로 졸업해 일본에서 공부했다. 어머니는 전주여고 출신으로 조촌초교사였다.

큰누님은 중앙대 약대를 졸업했고, 둘째는 이대약대, 셋째 누님은 이대 도서관학과를 나오는 등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다.

정권에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김 의원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 신흥고 재학부터 시위현장을 다녔다. 1977년 학교 입학 후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시작한다.

그해 ‘고난동참선언문’을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1978년(2학년)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전국 교회 대학생(청년부)들이 전주에 모였다. 당시 교회는 약간 합법적인 공간이었다. 때문에 교회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교회청년들이 학교에서 학생운동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1979년(3학년) 12월12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죽는다. 그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 독재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위수령 및 쿠데타가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다. 그는 이 모든 순간 역사와 함께했다.

1980년(4학년) 4.19 행사를 주관하게 된다. 5월 항쟁의 예비 집회를 한 것이다. 5월13일 전국 대학생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한다.

여기에 모인 대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부르짖으며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14일 오전, 전국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날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15일 오후에는 서울역에 10만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서울역광장을 중심으로 자리에 앉아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시위열기가 폭발할 듯 뜨거웠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군 병력 이동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5·18 40주년] 김남규 시의원. 1980년. 다시 돌아가도 학생운동 한다
김남규 전주시의원은 80년 5월 이야기를 늦은 밤까지 이어갔다.


각 대학 대표들은 서울역에서 시위를 계속할지를 놓고 고심하다 학교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였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학교로 돌아온 김 의원은 5월17일 0시를 기점으로 학교를 나온다. 고학년은 피신해서 장기전에 대비한다는 내부 방침 때문이다. 5월18일 군부는 학교에 들어와 후배들을 짓밟았다.

그도 1급 수배령이 내렸고 6월14일 덕진동 덕암 마을에서 주민신고로 잡혔다.

전주 완산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갖은 고문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이후 35사단 헌병대에 끌려가 계엄군 조사를 받았고, 7월 광주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았다. 호남 계엄사령부가 광주에 있어서다. 그리고 강제징집 당했다. 5사단에서 제대할 때까지 보안대에 수시로 끌려가 두들겨 맞고, 프락치 강요받고,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순간이다.

83년 5월 33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85년 학교에 다시 복학해 줄기차게 학생운동을 한다.

86년 기독교 농촌개발원에 들어가 농민운동을 했다.

87년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부안에서 소몰이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1년 5·18 민중항쟁 전북 동지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2대 회장으로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활동했다.

김남규 의원은 “당시 50여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신적 트라우마에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 고문 후유증으로 먼저 가신 분 등 30여명도 채 안 남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1980년으로 돌아가도 학생운동, 노동·농민운동을 했을 것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1998년 전주시의회 의원에 당선된 후 지금까지 전주 최다선(6선)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의원은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이 헌법에 담겨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고 국민적 통합도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964425@fnnews.com 김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