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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정크본드도 사는 SPV, 한은·정부 협업 빛났다

美 재무부·연준 사례 본떠
위기 돌파에 비상한 의지

한국은행과 정부가 큰일을 했다. 공동으로 특수목적기구(SPV)를 세워 저신용등급 회사채, 심지어 일부 투기등급(BB) 회사채까지 사주기로 했다. 20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4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경제 중대본) 회의에서 나온 결정이다. SPV는 10조원 규모로 6개월 동안 가동된다. 시장 상황을 봐서 규모를 20조원으로 늘리고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한은은 한은법(80조)에 따라 영리기업(SPV)에 대출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조항을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SPV는 산업은행 출자 1조원, 산은 후순위 대출 1조원, 한은 선순위 대출 8조원으로 재원을 조달한다. 국책 산은이 1조원을 출자한 것은 사실상 정부가 회사채 상환을 보증한다는 의미다. 한은 대출을 '선순위'로 한 것은 만에 하나 채권 상환에 어려움이 닥치면 한은이 먼저 변제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정부 보증 채권만 매입할 수 있는 한은의 특수 위치를 고려한 조치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 경제위기를 미증유의 비상경제시국이라고 불렀다. 한은이 투기등급 회사채를 매입하는 기구에 자금을 대기로 한 것은 '미증유'에 걸맞은 결단이다. 앞서 한은 이주열 총재는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뜨린 데 이어 한국판 무제한 양적완화에 착수했다. SPV 설립은 반신반의했으나 현실이 됐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보인 한은의 결단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SPV 설립은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의 협업 시스템을 본뜬 것이다. 4월 초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투기등급 회사채(정크본드)와 주택저당증권(MBS)까지 매입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사실 위기 국면에서 우량 회사채는 가만 둬도 시장에서 소화된다. 문제는 저신용등급 또는 투기등급 회사채다. 특히 자금사정이 갑자기 나빠진 '타락천사'(Fallen Angel)들이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에선 포드자동차, 메이시백화점 등이 타락천사가 됐다. 한은 역시 투기등급 회사채의 경우 타락천사 기업으로 매입을 한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코로나 위기 속에서 다양한 금융시장 안정조치를 취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과 증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하고,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채권(P-CBO) 발행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비우량기업들은 혜택에서 소외됐다. SPV 설립은 이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다. 어렵게 성사된 협업 시스템이 현장에서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준비작업에 차질이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