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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 유엔 특별재판소 판결에 궁지…수니파·美 총공세

재판부 "헤즈볼라, 전 총리 제거 동기 있지만 개입 증거 無" 헤즈볼라, 용의자 신병 인도 거부…전 총리 아들 신병 인도 압박 미국 "헤즈볼라, 레바논 수호자가 아닌 親이란 테러조직" 공세

헤즈볼라, 유엔 특별재판소 판결에 궁지…수니파·美 총공세
[레이드센담=AP/뉴시스] 18일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에 설치된 레바논 라피크 하리리 전총리 암살에 관한 유엔지원 특별재판소 판결을 앞두고 데이비드 레 재판장 등 3인 판사가 상석에 앉아 있다. 2020.08.19

[서울=뉴시스] 이재우 기자 = 유엔 특별재판소가 친(親)이란 레바논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 대원 1명에 대해 수니파인 라피크 하리리 전(前) 총리 암살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면서 레바논 의회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헤즈볼라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레바논은 지난 4일 발생한 베이루트 폭발 참사로 내각이 총사퇴한 상태다.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아들인 사드 하리리 전 총리는 헤즈볼라 지도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특별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헤즈볼라를 공개 압박하고 나섰다. 미국도 헤즈볼라가 레바논의 수호자가 아니라 이란의 종파적 이익을 대변하는 테러단체라는 점이 확인됐다고 공세에 나섰다. 반면 헤즈볼라는 관련 혐의를 부인하면서 피고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AP통신과 BBC, 아랍뉴스 등에 따르면 유엔 특별재판부는 이날 헤즈볼라와 시리아가 하리리 전 총리를 제거할 동기가 있었지만 헤즈볼라 지도부가 테러에 관련됐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하리리 전 총리는 시리아에 레바논에서 철군할 것을 요구하다가 지난 2005년 자살폭탄 공격을 받고 숨졌다. 그는 이란과 시리아의 레바논 내정 개입에 반대하고 친(親)사우디아라비아·서방 행보를 걸었다. 서방과 친사우디 성향 레바논 정파들은 헤즈볼라와 그 후원자인 이란, 시리아를 암살 배후로 지목해왔다.

유엔 특별재판소의 데이비드 레 소장은 "헤즈볼라와 시리아는 하리리 전 총리를 제거할 동기를 갖고 있었다. 암살은 역사적, 정치적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면서도 "헤즈볼라와 시리아가 하리리 전 총리 암살에 관여하거나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번 사건의) 증거는 대부분 정황에 가깝다"면서 "누가 폭탄을 터뜨렸는지 단정할 없지만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남성 시신 수십구가 현장에서 수거됐다"고 부연했다.

유엔 특별재판소는 하리리 전 총리 암살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헤즈볼라 대원 4명 중 주범 격인 살림 아야쉬 1명에게만 테러 공모와 살인 등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헤즈볼라 중간급 조직원인 살림 아야쉬가 폭발한 화물차를 구입하는 등 중심적이고 직접적인 역할을 한 증거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나머지 3명에게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고 발부됐던 국제 체포영장을 철회했다. 유엔 특별재판소는 5번째 용의자였던 헤즈볼라 최고사령관 무스타파 바드레딘이 지난 2016년 시리아에서 사망하자 국제 체포영장을 철회한 바 있다.

이번 사건은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혐의를 부인하고 대원들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면서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됐다. 외신들은 헤즈볼라가 이번 재판을 이스라엘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살림 아야쉬가 유죄 판결에도 수감될 가능성은 없다고 부연했다.

외신들은 지난해 반(反)정부 시위로 물러난 사드 하리리 전 총리가 현재 의회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헤즈볼라에 대항할 지렛대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레바논 정권은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기독교 마론파가 분점하고 있다.

사드 하리리 전 총리는 판결 직후 기자들과 만나 "사람들의 기대는 오늘 판결보다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면서도 "재판부가 만족스러운 판결을 내렸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어 "헤즈볼라가 제물을 바칠 때다. 그 조직(헤즈볼라)에 책임이 있음이 명백해졌다"며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쉬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위터에도 "범죄자들이 재판에 넘겨져 정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며 "범죄를 대가없이 정치에 이용하는 시대는 끝났다"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도 유엔 특별재판소의 판결을 환영하면서 헤즈볼라를 맹비난했다. 미국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지정한 바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헤즈볼라 공작원들은 '단독 행동(freelance)'을 하지 않는다"며 "이번 유죄 판결은 헤즈볼라와 그 조직원들이 그들의 주장과 달리 레바논의 수호자가 아니라 이란의 악의적인 종파적 의제를 확산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테러조직이라는 점을 세계에 인식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환영했다.

친헤즈볼라 성향인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판결에 앞서 자신의 트위터에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암살은 레바논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면서 "늦은 정의가 공정하지 않더라도 특별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한편,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는 1975~1990년 레바논 내전 이후 5번이나 총리를 역임한 억만장자 출신 사업가다. 그는 2004년 마지막 총리직 임기를 끝낸 뒤에도 의회 야당과 연합해 1976년부터 레바논에 주둔하던 시리아군의 철군을 요구해왔다.

그는 지난 2005년 2월14일 무장 자동차를 타고 베이루트 시내를 이동하던 중 대규모 자살폭탄 테러를 당해 수행원 21명과 함께 사망했다. 그의 죽음 직후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벌어졌고 친시리아 성향 정부는 2주만에 사퇴했다.
시리아군은 같은해 4월 철군했다.

유엔 특별재판소는 지난 7일 판결을 할 예정이었지만 앞선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대규모 폭발 참사가 벌어지면서 2주간 연기됐다. 하산 디아브 레바논 총리는 지난 10일 폭발 참사의 책임을 지고 내각 총사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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