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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져?" 갈길 먼 경비노동 '정상화'의 길 [현장르포]

24일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입주자 부당지시 금지하는 등 '경비원 보호' 내용 담겼지만 
경비원들 "이번이라고 뭐가 달라지겠나" 현장 반응 '싸늘'
지하주차장 정산소서 하루종일 업무·식사·휴식 모두 해결
곰팡이에 오물·악취에도 '단기 계약직' 신분에 건의 못해
"경비원 정당한 대우가 결국 입주민 이익으로 귀결"

[파이낸셜뉴스] "오늘도 주차 정산때문에 앉아서 밥 먹다 10번도 넘게 일어났지. 휴게시간, 점심시간 있어봐야 써먹지도 못하는데... 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퇴직 후 10년 이상 경비원으로 일해 온 하모씨(75)씨는 지난 24일 통과된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 내용을 듣고 이같이 말했다. 지난 5월 고 최희석 경비원 사망 이후 '입주자 갑질'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여론이 형성, 입법으로까지 이어졌지만 현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고용 구조 및 처우개선이 "이번이라고 실천되겠냐"는 회의감 때문이다.

"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져?" 갈길 먼 경비노동 '정상화'의 길 [현장르포]
서울 마포구의 한 주상복합건물 지하주차장에 위치한 경비노동자의 사무실 겸 휴게실. 주말동안 경비노동자는 이곳에서 업무와 식사, 휴식을 모두 여기서 해결한다. 사진=김나경 인턴기자
21대 국회는 이른바 경비노동자보호법으로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 일부개정안을 본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법의 핵심은 경비원이 경비업무 외 택배·주차관리 등의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입주자 등이 법에 위반되는 지시나 명령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경비원 업무범위를 넓힘으로써 고용안정을 도모하고 입주자 갑질을 법적으로 금지해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지난 26일 만난 경비원들은 "시정되지도 않을 것,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며 강한 회의감을 나타냈다. 서울 마포구 한 주상복합에서 일하는 하씨는 "(입법이 되기) 전에도 택배와 쓰레기 처리, 주차 정산까지 다 하고 있었다"며 "노동환경이 좋아하지는 게 아니라 더 나빠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경비업법에 따라 경비원이 경비업무만 할 수 있도록 한 때에도 다른 업무까지 도맡아 해와서 이번에 달라지는 점이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하씨는 현 업체와 계약 당시 "주차 정산의 경우 업무를 보조하는 정도"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주말에는 아침부터 자정까지 지하주차장 정산소에서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정산소 직원이 평일에만 근무하는 데다 경비원 휴게실이 정산소로 되어있어 일도, 식사도, 휴식도 모두 같은 공간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취재과정에서 직접 찾은 이 공간 입구에는 CCTV와 카드결제기가 놓인 업무용 책상이, 뒤편에는 냉장고와 작은 식탁, 침대 매트리스가 자리해 있었다. 이에 대해 하씨는 "하루종일 여기 있어야 하는데 지하라 환기가 안 돼 공기가 너무 탁하다"며 "시동을 켰다 껐다 하는 소리에 배기가스까지 더해져 환경이 정말 열악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져?" 갈길 먼 경비노동 '정상화'의 길 [현장르포]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의 경비원 사무실. 이 아파트에는 공동 화장실이 없어 경비원은 화장실 이용을 위해 관리사무소나 아파트 상가까지 가야 한다. 사진=김나경 인턴기자

"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져?" 갈길 먼 경비노동 '정상화'의 길 [현장르포]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 아파트에 위치한 경비노동자 사무실. 사진=김나경 인턴기자

대규모 아파트단지에서 근무하는 경비원들 또한 입법 내용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실질적인 노동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영등포구 1500세대 이상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일하는 이모씨(77)는 현관문 안 1층 경비실에서 하루 12~13시간 근무하고 있다. 지금처럼 선선한 가을은 괜찮지만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 '죽을 맛'이었다. 경비실 위를 지나가는 배기관에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피거나, 지하 휴게실에 오물이 흘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이에 대해 건의할 수 없었다.

그는 "3개월에 한번씩 계약서를 쓰기 때문에 자기 권리를 요구하고 찾기가 힘든 구조"라며 "경비원들은 관리사무소 소장, 본사 관리자의 점수나 평가에 신경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말로, 입주자의 월권적 업무지시를 금지하는 것이 처우개선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씨는 "입바른 소리하지 않고 앉아서 '바보짓'하는 게 일자리를 보전하는 길"이라며 최소한의 고용 안정이 보장돼야 처우도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 최희석씨와 같이 안타까운 죽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의 근무환경 개선과 더불어 노동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시계약직 노인장' 『임계장이야기』(후마니타스, 2020)를 쓴 조정진씨는 "경비원이 감시·단속적 근로자가 아님을 인정받아 근로기준법에 부합하는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정당한 대우는 경비원의 충성도를 높이게 돼 궁극적으로 입주민의 이익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에 통과된 공동주택관리법 일부개정안에 따르면 입주자가 경비원에게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강요했을 경우 지자체장이 사실조사 및 시정명령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개정사항은 공포 후 6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법 통과됐다고 뭐가 달라져?" 갈길 먼 경비노동 '정상화'의 길 [현장르포]
서울 영등포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 1층 공동현관 밖에 위치한 경비실 내부 모습. 이 경비실 안에 놓인 TV는 40년 이상 된 노후 TV다. 사진=김나경 인턴기자

dearname@fnnews.com 김나경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