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물찻오름’·봉개동 ‘물장오리’ 화구호
물찻오름 화구호의 겨울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제주=좌승훈 기자】 경사가 비교적 급한 탓인지 어느덧 넓적다리가 뻐근해오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해발 717m의 가파른 숲산,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물찻오름의 정상 화구호는 늘 검푸른 물로 넘실댄다.
‘이까짓 작은 봉우리에 볼만한 게 뭐가 있을까’ 싶던 속내는 어느새 정상에 펼쳐진 오묘한 풍경에 연신 탄성을 토해낸다. 몸도 마음도 하늘도 가을빛에 푹 젖어든다.
■ 들꽃 세상과 신록, 붉은 단풍, 설경…명품 숲길 사계 뚜렷
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다. 우선 5.16도로에서 조천읍 교래리 방향으로 난 길과 남조로 제주경주마목장 남쪽 붉은오름에서 난 길, 그리고 예전에는 5.16도로 성판악휴게소 건너편 표고버섯 재배장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기도 했다.
물찻오름에 방목중인 소. 눈부신 가을이 따로 없다.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길은 사계절이 뚜렷하다. 숲길 주변은 들꽃 세상과 신록, 붉은 단풍, 눈부신 설경 등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2007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숲길부문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오름 정상 화구호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붕어가 살고 있어 신비함을 더한다. 제주 땅을 처음 밟은 이들에게는 색다른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가슴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장관이다.
물찻오름은 들꽃의 보고(寶庫)다. 특히 난대성 식물과 온대성 식물이 고루 자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숲의 보존이 잘 돼 있다. 약용으로 알려진 백작약이 자생하고 있으며, 백운란·으름난초와 같은 멸종위기 2급인 식물도 관찰된다.
화구호는 오름 위에 펼쳐진 하늘을 담고 있다. 또 주위를 에워싼 숲의 빛을 머금어 비경을 자랑한다. 화구호 둘레는 1000m 가량 된다. 깔대기형으로 못이 움푹 들어앉아 있다.
물찻오름 화구호의 여름 /사진=fnDB
못 바닥과 주변에는 습지 식물과 육지 식물들이 '네 땅 내 땅'을 사이좋게 나눈 듯이 군락 경계선을 뚜렷이 드러냈다. 특히 이 일대는 양서류와 파충류가 많다. 개구리·두꺼비·도롱뇽·유혈목이·도마뱀 등의 양서류나 파충류는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수중과 육지에서 모두 생활하므로 환경오염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물장군은 다른 지역 종들과는 유전적으로 다를 가능성이 높아 유전자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도마뱀의 생태를 관찰하다 문득 떠올린 어린 시절 의문 하나. 잘린 도마뱀의 꼬리는 어떻게 해서 다시 생겨나는 것일까? 도마뱀 꼬리는 잘리는 곳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또 잘려 나간 꼬리 부분에는 망가진 꼬리를 판독해 재생시키는 유전자 정보가 박혀 있기 때문에 도마뱀의 꼬리는 잘려도 잘려도 또다시 생긴다고 한다.
■ 설문대 할망 전설 깃든 곳…퇴적물 분석 고식생 타임캡슐
물장오리로 가는 길, 숲길을 지나 꾸불꾸불 골짜기를 두세 차례 건넜을까? 비탈이 무척 가파르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일 뿐이다. 높고 푸른 하늘, 길섶의 풀벌레 소리, 하늘거리는 들꽃에도 잠시 눈을 뺏기고 어느새 마음이 넉넉해진다. 특히 ‘물장오리’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오름 정상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고여 있다. 기분도 한결 상쾌하다.
조선시대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이 편찬한 탐라지(耽羅志)에는 “산봉우리에 용못이 있는데, 지름이 50보 정도 되고 깊이는 잴 수 없다.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친다.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돼 있다.
물장오리와 한라산 [사진=제주도 제공]
물장오리는 5·16도로 물장올교 인근에 있다. 행정구역을 놓고 볼 때 제주시 봉개동에 해당된다. 해발 9387m, 늪이 있는 곳은 해발 900m가량 된다.
정상의 물이 괸 화구호 크기는 400m 남짓. 화구호의 둘레는 1500m나 된다. 물찻·동수악과 함께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몇 안 되는 화구호 중 하나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주풍토록’을 쓴 충암 김정(沖菴 金淨·1520 제주 유배)의 기우축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퇴적물 분석을 통해 고식생(古植生)을 밝혀낼 수 있어 학술적 가치도 매우 높은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2017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지형·식상·기후 기초학술조사' 결과, 물장오리는 8100년 전에 마지막 화산활동을 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지금 같은 산정호수 형태는 900여년 전부터 유지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분화구 퇴적층 분석을 통해 아래쪽(7.5m) 퇴적층은 약 8100년 전에, 위쪽(0.43m)은 약 300년 전에 쌓인 것을 확인했다. 또 과거 약 8000여년 동안 제주도 기후변화를 추적해 360년·190년·140년 주기로 우기와 건기가 반복된 것도 밝혀냈다. 이 모두가 타임캡슐 퇴적층을 통해 물장오리 그릇이 만들어진 연대기를 알아낸 것이다.
물장오리 화구호에 서식하는 산개구리 /사진=fnDB
화구호로 향하는 길은 단풍나무·서어나무를 비롯해 울창한 낙엽수림지대를 이룬다, 낙엽수림지대를 벗어나면, 찔레덩굴·보리수나무·조릿대군락이 전개된다.
정상의 굼부리는 접시모양이다. 이곳은 항상 물이 고여 있다. 오름을 형성하고 있는 용암류가 멀리까지 흐르지 않고 주변 기반만을 형성한 결과 기반이 두터워져 분화구 안에 물이 고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거신(巨神) ‘설문대 할망’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한라산·오백나한과 함께 예로부터 3대 성산(聖山)으로 신성하게 여겨왔다. 부정한 사람이 이 오름에 오르면 갑자기 운무가 낀다고 할 정도로 성스러운 곳이다. 몸과 마음을 가다듬지 않고 함부로 올라 소란을 피우다가는 화를 입는다고 한다.
신성함의 중심은 산정 호구호다. 물장오리는 일명 ‘창터진 물’이라고 한다. 바닥이 터졌다는 것으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인데, 설문대 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연물이 깊다기에 발을 담가보니 발등 밖에 되지 않았지만, 물장오리에 와서 성큼 들어서니 설문대 할망이 물속에 빠져 사라지고 말았다는 게 전설의 골자. 물이 얼마나 깊었기에 신(神)도 빠져 나오지 못했을까? 허망하다.
한라산, 영실기암과 더불어 3대 성산(聖山)으로 일컬어지는 물장오리.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제주환경운동연합은 생태조사를 통해 이곳에 미꾸리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미꾸리는 늪이나 논 혹은 농수로 등 진흙이 깔린 정체된 곳에서 많이 산다. 오염이나 수량의 증감에도 잘 견딘다. 오름의 정상, 화구호 밑바닥에 미꾸리가 살고 있다하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하지만 이곳도 수중 생태계에서 육지 생태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특히 화구호 길목인 북쪽지역에는 건조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의해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이곳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급인 매와 2급인 팔색조, 솔개, 조롱이, 삼광조가 서식하고 있고, 멸종위기 곤충인 왕은점 표범나비와 물장군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 제517호인 동시에, 2009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돼 있다.
제주시 봉개동 물장오리 명품 숲. 제주의 창조신화와 자연적 가치가 어우러진 곳이다. [사진ㅇ=제주관광공사 제공]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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